지난 2월 말, 1년 일정으로 상해에 온 이래 시간은 정말 빨리 지나가 이제 석 달만 있으면 중국 생활이 마감된다. 짧은 기간이어서 중국을 제대로 보고 느끼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고 또 부분으로써 전체를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할까 저어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방인으로 그 속에서 살면서 체험한 점들을 간략히 정리해보는 것도 의의가 있을 듯 하다.
1. 서민의 발, 자전거
소학 4, 5학년인 우리 집 아이들은 아침마다 내 눈치를 슬슬 살핀다. 도보로 40여분 걸리는 학교까지 걸어가지 않고 어떻게 자전거 뒤에 얹혀 편히 갈 수 있을까해서이다.
어릴 때 엉덩이 찧어가며 배워 둔 자전거 타기가 오늘날 이렇게 쓸모가 있을 줄이야... 나는 자전거를 수단으로 아이들을 휘어잡으며 선심 쓰듯이 서랍에서 자전거 열쇠를 꺼내들고 아파트 지하 주차장으로 향한다.
입구에 대 여섯 대의 자동차가 서있다. 뒤로 돌아가면 오토바이가 십 여 대 서있고 그 옆에 몇 열로 백 여대의 자전거가 빼곡이 주차되어 있다. 자전거 보관대 안쪽으로는 주인이 찾아가지 않아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 쓴 자전거도 십 여대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자전거를 몰고 거리에 나오면 출근하는 자전거들로 도로가 붐비기 시작한다. 파란 신호등이 들어와 자동차를 정지시키자 수많은 자전거와 도보 행인들이 함께 도로를 건너간다. 자전거와 사람이 엉키는데도 별 사고 없이 진행이 잘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신기하다.
중국의 소학(초등학교) 정문 앞에는 자전거에 어린아이들을 태워 등교시키는 할아버지, 엄마, 아빠들로 몹시 복잡하다. 원거리를 통학하는 중학 이상의 학생들은 직접 자전거를 몰고 등교를 한다.
중국은 자전거 왕국이다. 서민들의 주요 교통 수단으로서 큰 도로에는 반드시 자전거 전용 도로가 있고 아침, 저녁 출근 시간에는 거대한 자전거 부대의 이동으로 길 양쪽이 가득 차기 마련이다.
처음 중국에 왔을 때 샹하이가 대도시인데도 불구하고 도시의 규모나 발전 정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자동차 수에 놀랐고 길을 꽉 메운 자전거 수에 더욱 놀랐다.
우리도 이곳에서 살아가자면 속히 자전거를 구입해야 했다. 한국 상사가 경영하는 대형 할인점인 이마이더(易買得, 이마트, 쉽게 산다는 뜻으로 음가와 잘 어울리는 이름임)에 가보니 새 자전거는 200元(중국 인민폐에다 160을 곱하면 대략 한국화의 값어치가 됨) 이상이었다.
1년만 타면 되는데 굳이 새 자전거를 살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집 근처 도로변에 있는 자전거포를 찾았다. 헌 자전거 한 대를 80元에 살 수 있었다. 그 후로 이 낡은 자전거는 우리 집 애마로써 자가용의 역할을 잘 수행해주었다. 그동안 양쪽 페달을 하나씩 갈아넣고 바구니를 새로 바꾼 것 이외에는 별 탈 없이 학교로 시장으로 잘 타고 다니고 있다.
상해에 갓 도착한 한국 유학생들이 신형 자전거를 구입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도난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자전거가 워낙 흔하여 헌 자전거는 본 듯 만 듯 하지만 번쩍거리는 새 자전거는 상당히 위험하다. 눈독을 들인 누군가가 자물쇠를 자르고 가지고 가버리면 대책이 없다.
중국에서의 자전거는 스포츠 레저용이 아닌 주요 교통수단이므로 세금을 내어 등록하고 번호 판을 달게 되어 있다. 신고 기간을 알리는 안내문이 더러 눈에 띤다. 번호 판이 없을 경우 꽁안(公安, 중국 경찰)이 적발하여 자전거를 견인해가고 벌금을 매긴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집 주위에 세워진 자전거와 거리를 오가는 자전거 중에 번호 판을 단 것보다 그렇지 않은 자전거가 더 많은 걸 보면 교통 질서를 위반하거나 사고를 내지 않는 한 그대로 묵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듯 하다. 법과 생활과의 거리일까?
자전거가 이렇게 많으니 곳곳에 보관대와 수리점이 설치되어 있다. 특히 할인점이나 지하철 역 등에는 우 마오(5角, 角은 元의 10분의 1 단위)만 주면 별도의 자전거 보관대가 있어 비교적 안전하게 주차시킬 수 있다. 어디서나 수리점을 손쉽게 찾을 수 있으므로 길 가다가 탈이 나도 곧 수리할 수 있고 가격도 저렴하여 타이어 하나에 바람을 넣는데 양 마오(2角)면 충분하다.
비가 오면 어떻게 하나? 한국 유학생들이 일명 ‘독수리 5형제’라 부르는 자전거 전용 비옷이 있다. 챙이 있는 후드가 달린 비닐 망토인데 길고 넓게 펴져서 운전대와 뒷좌석까지 덮어 준다. 그로 충분한데도 혹 빗방울이 들어갈까 빨래 집게 같은 것으로 비옷과 자전거를 함께 집어서 다니는 이들도 있다. 비 오는 날 색색의 ‘독수리 5형제’들이 거리를 누비며 달린다.
여름철 한 낮의 땡볕을 가려주는 팔목 달린 덮개도 있다. 일종의 토시처럼 햇볕에 살갗이 타는 것을 막기 위해 주로 여성들이 착용하는데 허름한 천으로 지은 것부터 하얀 레이스 달린 멋쟁이 스타일까지 모양이 다양하다.
또 우천시나 동절기에 어린 아기를 태울 경우 비닐로 만든 작은 집 모양의 텐트를 뒷좌석에 싣고 다닌다. 아이의 몸이 작은 노란 색 집 속에 쏙 들어가고 다리만 밖으로 나와 달랑거리는 모습이 하도 귀여워 지나가는 자전거를 보며 웃음을 머금은 적이 있다.
거리를 오가는 수많은 자전거들.
책가방을 맨 학생의 자전거, 신사복을 입고 구두를 신은 회사원의 자전거, 정장 치마에 멋을 부린 아가씨의 자전거, 앞뒤로 장바구니로 묵직한 주부의 자전거, 산만한 짐을 실은 일군의 자전거, 뒤에 수레를 달고 온갖 잡동사니를 실은 상인의 자전거...
그러나 중국에서도 소득이 높아지면서 점차 자동차가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현재는 100명 당 1대 꼴로 자가용을 보유하고 있다고 중국 정부가 발표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웬만한 중산층은 자전거 대신 자가용 승용차로 바꿀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기존의 시설로 보아 주차 난이 대단히 심각해질 것이다. 또한 상해의 경우 가뜩이나 좋지 않은 공기가 오염으로 더욱 흐려지며 교통 혼잡이 가중될 것이다.
자전거는 인간과 기계의 합작품이다. 사람의 다리 힘을 동력으로 삼으니 건강에 좋고 오염이 없어 환경을 보호할 수 있고 좁은 면적에 주차가 가능한 점 등 자전거의 장점을 꼽으라면 한이 없다.
우리도 자전거로 등교하고 출근할 수 있다면 어떨까? 아마 오봉산 꼭대기까지 몰고 가기는 무리일 것 같고 학교 진입로의 문구점들 옆에 자전거 주차장을 세워야 하나... 학생과 교사가 한 둘이 아니니 그것도 보통 일이 아니겠다 싶어 혼자 공상하다가 웃고 말았다.
건강한 서민의 모습을 느낄 수 있는 중국의 특징인 자전거. 앞으로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면 나의 이기적인 바램일까?
2. 도로와 대중 교통 수단
처음 바다를 건너 중국 상공을 비행기로 날 때 아래에 보이는 상해의 도시 구획선이 상당히 반듯함을 느꼈다. 상해의 도로는 대도시여서 그런지 정비가 잘 되어 있다. 도로명과 주소만 가지면 쉽게 집을 찾을 수 있다.
동서 방향과 남북 방향으로 도로명이 통일되어 있는 경우도 있는데 예를 들면 우리가 사는 지역의 동서 방향은 정통로, 정민로, 정화로, 정수로 등 政자로 남북 방향은 국순로, 국권로, 국년로, 국복로 등 國자로 시작한다.
도시에서 개인의 교통 수단은 자전거와 오토바이 등이지만 대중의 교통 수단은 버스, 지하철, 택시 등이다.
버스는 공공치처(公共汽車), 샤오공공치처(小公共汽車), 우궤이띠엔처(無軌電車)의 세 가지 형태가 있다. 공공치처에는 한국 버스 같은 일반 버스와 2층 버스, 두 대의 차량을 연결하여 중간의 접속 부분이 아코디언처럼 생긴 버스, 이렇게 세 가지가 있다.
상해에서 처음 2층 버스를 보고 우리 아이들이 좋아라 탔었는데 몇 번 타보니 별 것 아닌지 그 다음부터는 그리 욕심을 내지 않았다. 차체가 높고 다소 흔들림이 느껴지므로 운행 시에는 조심해서 아래 위층 계단을 오르내려야 한다. 2층 맨 앞좌석은 전면 유리로 전망이 넓다.
아코디언 버스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시내의 극장으로 연극을 보러갈 때 여러 차례 이용했다한다. 두 대의 버스를 붙여 놓은 것이라 한꺼번에 많은 승객을 수송할 수 있으나 때로 연결 부분이 노후 되어 틈새로 도로 밑면이 보이기도 한다. 북경에도 이 차가 많이 있다.
샤오공공치처는 개인이 운영하는 버스인데 우리나라 봉고보다 조금 큰 크기의 소형 버스로 차장이 창 밖으로 호객 행위를 한다. 정거장이 아닌 곳에서도 손님이 있으면 정차하기도 하며 요금은 구간에 따라 달리 받는데, 이 버스들은 대개 오래되어 낡고 지저분하다. 상해의 승객들은 스폰지가 다 삐어져 나오고 푹 꺼진 의자에도 개의치 않는 대범함을 보인다.
우궤이띠엔처는 도로 면에 레일이 없고 차체의 위쪽에 전선이 연결되어 있는 버스 형태의 전차인데 진행하는 구간이 정해져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없는 차량이라 줄을 달고 느리게 운행하는 이 차를 시내에서 보고 있으면 마치 옛날 흑백 사진의 한 장면이 눈앞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버스 요금은 시내 운행의 경우는 차 앞면에 ‘콩티아오 (空調 에어컨디셔너)’라는 글자가 있고 없음에 따라 다른데 일반적으로 에어컨이 없는 것은 1元, 있는 것은 2元이다. 거리별로 3元이나 그 이상을 받는 것도 있다.
중국의 버스에는 대개 차장(중년의 남녀가 많다)이 있어 승객에게 요금을 받고 얇은 종이 끈 같은 영수증을 내주며 주차장에서 큰 소리로 호객 행위를 하기도 한다. 차장 없이 승객이 직접 동전을 넣거나 버스 카드를 찍는 버스도 있다.
현재 상해시는 낡고 노후된 차량을 점차 새 차로 교체해가고 있다. 지난 봄에 우지아창에서 와이탄으로 갈 때 탄 55번 일반버스가 무척 낡았었는데 몇 달만에 그 노선 버스를 다시 타보니 완전히 새 차를 배정해놓았다. 좌석 시트도 고급스럽고 차내에 텔레비전까지 구비되어 있어 차비 1元을 내는 게 맞나 재확인해볼 정도였다. 2010년 상해에서 세계박람회를 개최한다니 그에 맞춰 상해의 대중교통 시설 수준을 한층 발전시키려는 모양이다.
택시는 요금제에 따라 구분하는데 도시마다 기본 요금이 다르다. 북경, 상해 등 대도시는 10元이지만 7元 내지 5元에 불과한 중소도시도 있다. (예; 남경-7元, 소흥-5元)
특이한 점은 앞자리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아크릴로 된 투명 보호막이 있다는 것이다. 운전석을 둘러싸고 있어 조수석에 앉으면 상대적으로 공간이 좁아진다. 그 보호막 사이에 난 작은 구멍을 통해 요금을 주고받는다. 강도를 막기 위해서인 것 같은데 그만한 효과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중국 전역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어서 소주나 승덕 같은 다른 도시에 가보니 보호막이 없는 택시도 있었다. 또한 북경의 작은 택시는 아크릴 대신 강철로 운전석이 막혀 있어 철창을 붙들고 얘기해야 하며 뒷자리로 에어컨 바람도 통하지 않아 몹시 더웠다.
택시마다 영수증 발급 기계가 있어 택시 요금을 내면 반드시 영수증을 내어준다. 영수증을 잘 보관하면 그 곳에 찍힌 전화 번호를 보고 나중에 분실물을 찾거나 부당함을 신고할 수 있어 편리하다. 그러나 필요 없는 물건이라 말하며 귀찮아하는 기사도 여럿 만났다.
중국의 교통질서는 어떠한가? 일괄적으로 단언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내가 체험한 바에 의하면 상당히 혼잡하다. 난폭하게 운행하는 차량도 많고 경적을 자주 울리는 편이며 횡단 보도에 신호등이 있으나 직진 차량을 제외하고 우회전, 좌회전하려는 차는 그대로 통과하는 경우가 많아서 깜짝 놀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파란 신호등이 켜져도 자전거, 오토바이와 행인이 함께 건너기 때문에 항상 전후좌우를 잘 살펴야 한다. 무단 횡단하는 일도 많아 상해 복단대에서 경북대로 파견된 중국 교수 한 분이 말하기를 경대 북문 앞 횡단 보도에서 수많은 학생이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서있는 모습이 대단히 인상적으로 느껴졌다고 하였다.
그의 눈에는 상대적으로 교통 질서가 자리 잡힌 한국의 모습이 신기했나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중국은 훨씬 무질서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데도 한국에 비해 사고율이 낮은 점이 더욱 신기하다.
‘무질서 무사고’가 중국 교통의 특징이라 하지만 사고가 적은 것은 사람들의 태도에도 원인이 있지 않은가 싶다. 중국의 운전자들은 덜 신경질적인 것 같다. 한번은 택시를 타고 가다가 어떤 중학생의 자전거가 골목에서 튀어나와 급정거를 하면서 차체에 부딪혔다. 승객인 우리들은 놀라서 비명을 질렀지만 운전사는 별 말이 없었다. 그런 경우를 몇 번 겪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결코 아니겠지만 서로의 실수에 비교적 관대한 것 같았다. 그렇다고 중국인들이 나긋나긋하고 상냥한 것은 아니다. 말투 자체의 억양이 강하고 목소리가 커서 이야기 소리만 들으면 마치 싸우는 것 같이 거칠고 시끄럽다. 그러나 한국인에 비해 대체로 성격이 느긋한 것은 사실인 듯 하다.
상해의 지하철에는 칭궤이(輕軌)라 불리며 지상으로 운행되는 명주선과 지하로 다니는 1, 2호선의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시설이 깨끗하며 한국의 지하철과 별 다름이 없다. 매표소에서 거리에 따라 2元 내지 3元을 내고 얇은 종이 표를 한 장 산 다음 승무원이 서 있는 개찰구로 들어가면 손으로 조금 찢어 준다. 가지고 있다가 내릴 때 승무원에게 이 표를 다시 낸다.
지하철 정기 탑승자는 카드를 사서 기계에 대었다가 통과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지하철의 안내방송은 중국어, 영어 두 가지로 한다. 현재도 계속 지하철 노선 확장 공사를 진행중이라 한다.
우리 가족도 상해에서 웬만한 지역은 지하철을 이용해서 갈 수 있으므로 자주 이용하였다. 출퇴근 시간에는 앉을 자리가 없어 몇 정거장을 서서 가야 하는데 러시아워의 공공 교통수단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로 붐볐다.
상해의 대중 교통 수단은 값싸고 편리하다. 그러나 교통 질서는 좀 보완이 되어야할 것 같다. 어린아이나 이방인들도 안심하고 길을 건널 수 있도록 말이다. 상해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혼잡하고 정신 없는 도로에서 감히 건너 갈 생각을 못하고 멍하니 바라만 보다가 되돌아선 적도 있다. 일이 생기면 그 자리에서 혼자 어떻게 처리하나 걱정스럽기도 해서.
한국에 온 외국인들도 길을 건너거나 도로에서 운전하며 혹 나처럼 느낀 적은 없었는지 모르겠다. 낯선 곳에서의 긴장을 복잡한 교통 질서로 가중시키는 것은 좋지 않은 것 같다.
3. 대학가의 풍경
등교하는 아이를 자전거에 태우고 아침저녁으로 통과하는 곳이 푸단따쉬에 (복단대학 復但大學) 캠퍼스인지라 중국의 대학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대학생들은 공부를 대단히 열심히 하는 것 같다. 참고로 1905년에 설립된 복단대는 현재 중국 전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명문대로 이 대학에 들어오기 위한 입시 경쟁이 치열하다고 한다.
현재 우리 집 아이들의 푸따오(가정교사)인 예훼이는 이 대학 철학과 3학년인데 귀주성 출신이다. 그 곳에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입학 시험에서 省(인구는 3천만명)의 문과생 일만 7천명 중에서 30위안에 들었고 그래서 상해의 복단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한다. 전형적인 우등생 타입으로 성실하고 총명하여 우리 아이들의 중국어 학습을 알차게 도와준다.
복단대의 캠퍼스는 그리 특징적이거나 수려하지는 않으나 나무가 많고 조용하여 학원가 분위기가 난다. 캠퍼스가 넓어서 자전거로 이동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인데 이른 시간 학교 북편의 기숙사에서 나온 학생들이 숙사 앞에 세워진 자전거에 올라 강의실까지 줄을 지어 타고 간다.
상해가 중국에서는 제일 가는 패션 도시라 하나 학생들의 옷차림은 수수하고 여학생들도 거의 화장을 하지 않고 맨 얼굴로 다닌다. 간혹 노랗게 머리 염색을 한 학생이 있어 자세히 보면 유학생인 경우가 많다. 일본 학생이거나 한국 학생이거나...
아이를 복단대 정문 앞 도로변에 내려주고 돌아오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마주치는 장애인 학생이 한 명 있다. 한쪽 다리가 절단된 남학생인데 가방을 메고 목발을 짚고서 땀을 뻘뻘 흘리며 자전거 행렬 사이를 헤집어 그 긴 캠퍼스를 걸어가고 있다. 그처럼 걸어다니는 학생들은 거의 없다. 이름은 알 수 없으나 그를 만날 때마다 마음속으로 박수를 쳐주었다.
한국의 대학 강의 시간이 대개 9시부터 시작되는 데 비해 중국의 대학은 8시에 첫째 시간을 시작하는 것이 원칙이며 교수들은 강의 시간 5분전에 들어와서 수업 준비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강의가 끝난 후에는 꼭 사용했던 흑판을 직접 닦아 놓고 나간다고 한다.
7시 경 복단대 교정을 지날 때면 늘 만나는 팀들이 있다. ‘晨讀(새벽에 책을 읽는다는 뜻)’이라 새겨 놓은 바위 옆에 나무가 우거진 작은 숲이 하나 있는데 그 안의 벤치에 앉거나 서서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다. 바로 앞에 이어진 잔디밭에도 서성이며 큰 소리로 책을 읽는 남녀 학생들이 많다.
가까이 다가가 보면 그들이 읽고 있는 책은 대부분 영어 책이다. 중국의 공원이나 대학 캠퍼스에는 나무에 붙어 서서 소리내 책을 읽으며 공부하는 ‘매미 족’이 많다는 이야기를 한비야의 ‘중국 견문록’에서 본 적이 있는데 과연 사실이었다.
제스춰를 써가며 소리내어 읽고 외우니 공부는 제대로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중국 학생들이 영어에 강한 지도 모르겠다. 정문 들어서면 곧바로 마주치는 거대한 모택동의 동상 아래, 받침돌에 앉아 공부하는 학생도 꽤 많이 보았다. 교내 곳곳의 벤치를 독서대로 삼아 공부하는 학생들의 모습은 언제 보아도 싱그럽다.
또 한 팀은 아침마다 내가 통과하는 길목의 잔디밭에 서너 줄로 서서 기합을 넣어가며 열심히 운동을 하는 2, 30명의 학생들인데 그 운동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태권도이다.
자세히 들어 보면 설명이 모두 중국어인데 아마도 한국의 유단자가(혹은 중국의 유단자가) 중국 학생들을 모아놓고 가르치는 듯 하다. 모두들 땀을 흘리며 진지한 표정으로 임하고 있다.
그 앞을 지나가면서 나와 아이들은 일부러 한국말로 크게 외쳐 본다. ‘어, 태권도네.’ 하고서. 운동에 열중하느라 돌아보는 학생은 하나도 없지만 한국의 태권도가 중국의 대학생에게 보급되는 것을 보니 여간 뿌듯하지 않았다.
상해의 경우 한국 유학생이 대단히 많다. 국제 교류 학원의 정원 2000명 중 900명 이상이 한국인이라 한다. 따라서 학교 부근에 한국 물품을 판매하는 가게도 있고 한국 음식점도 여럿 된다. 맵고 얼큰한 한국 음식을 외국인도 좋아하여 한국 음식점에 가보면 중국인과 일본인뿐 아니라 국제 교류 학원에 다니는 미국인, 캐나다인, 독일인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 다음에 캠퍼스에서 아침마다 보는 팀은 태극권을 하는 중국 노인들이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대학 교정에 서서 중국 전통 무예인 태극권을 열심히 하고 있다. 동작은 느리나 힘이 많이 드는 듯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다. 천천히 들어올리는 팔 다리의 동작이 예사롭지 않다. 때로는 태극검이라는 긴칼을 쥐고 동작을 취하는 노인들도 볼 수 있다.
(아파트나 심지어 여행지에서도 이른 아침에 태극권을 하는 중국 노인들을 많이 보았다. 그래서 그런지 중국 노인들은 상당히 건강하다. 우리 아파트에서 우연히 만나 태극권 스승으로 모시게 된 할머니는 현재 75세이나 허리가 꼿꼿하고 자세에 흐트러짐이 없다.
온화한 인상의 이 할머니는 빠른 상해 사투리를 쓰는지라 말은 잘 알아듣지 못하지만 친절하고 상세하게 동작을 가르쳐주어 따라 하기가 쉽다. 아파트 광장에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40분 씩 지도해주는데 수업료 받기를 극구 사양하여 한국 김밥을 싸서 갖다 드리니 기뻐하셨다. 순수하고 진지하게 노후를 보내는 중국 노인들의 모습에서 배울 것이 많았다.)
이른 아침 대학 캠퍼스에는 나무에 등을 대고 탕탕 치거나 조깅을 하는 노인들도 눈에 많이 띤다. 인근 동네에서 운동을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중국에서도 조용하고 공기 맑은 대학 교정은 주민들에게 좋은 휴식처이자 공원이 되고 있다.
중국은 수질이 좋지 않아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수돗물 대신 광천수나 그 밖의 정화된 물을 배달시켜 먹는다. 대학교 안에도 물 배급소가 있어 그곳에서 불순물을 걸러내고 증류한 식수를 학생 기숙사나 부근의 가정에 배달한다.
자전거에 리어카를 매달고 무거운 물통을 잔뜩 실은 아저씨들이 아침부터 배급소에서 나와 배달을 시작하는 모습이 교정에 보인다. 학생 기숙사 앞의 좁은 길은 이미 주차되어 있는 학생들의 자전거와 잠시 정차한 아저씨들의 물통 수레로 교행이 어려울 때도 있다.
그 외에 청소하는 인부들의 수레, 교직원을 실은 대형 버스들도 눈에 띠는데 정문 및 여러 곳의 출입구에는 수위가 있어 그 곳을 통과할 경우에는 반드시 자전거에서 내려서 지나가게 한다.
밤에도 불이 환하게 켜진 대학 도서관을 보며 어느 나라든 개인과 사회, 국가의 밝은 미래가 이곳에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학습 열기만큼 졸업 후 진로에 대한 고민도 적지 않은 듯 하다. 직장을 당에서 일률적으로 배급하던 과거와 달리 자신의 능력과 적성에 따라 개인적인 선택을 해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복단대 정원 내에 작은 쇠 종이 하나 있는데 그 안에 이런 글귀가 씌어 있었다. ‘God bless me to find a good job by the end of this year.’ 누군지 모르나 그의 고민이 읽혀져 마음이 찡했다. 학업과 진로는 국적과 체제를 불문하고 대학생 공통의 관심사요 고민인가보다.
어쨌든 현재 중국 대학생들의 향학열은 대단하다고 보면 틀림없을 것이다. 또한 중국 대학생들은 그 어느 나라 학생보다 국가의 미래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한 듯 하다. 5년 이내에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자신한다. 정말 그렇게 될 지는 알 수 없지만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으로부터 국가 경쟁력이 배양됨은 분명한 사실이다.
* 보충 : ‘상해편지 9 북경대와 청화대를 가다’ 편에서 대학생들의 학비 개인 부담이 점차 늘어나는 경향이라 하였는데 실제 중국학생들은 많은 학비를 내고 있다고 한다. 현재 수업료와 기숙사비를 합하면 인민폐로 5000元이상인데 해마다 등록금이 인상되고 있다.
한 대학이라 할지라도 단과대별, 학과별로 수업료에 차이가 난다. 이곳에서 인기 있는 관리학과(한국의 경영학과에 해당)의 경우 3500元정도이고 역사과, 철학과 등은 3000元 선으로 차등 납입한다고 이 대학의 한 교수가 알려 주었다. 이렇게 학부 학생은 학비를 많이 내나 연구생(대학원생)들은 수업료가 면제되고 몇 백元 씩 생활비까지 지급된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중국 학생의 경우이고 한국 등 외국 유학생들의 수업료는 최소 8000元 이상이다. 지난 학기에 등록한 한 유학생은 미화 1250불(인민폐 10000元)을 내었다 한다. 현재 중국의 대학들은 흑자 경영을 위해서 산하에 각종 어학원을 세워 수업료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외국 학생을 대상으로 치열한 유치 경쟁을 벌이고 있다.
늘어나는 대학생 수, 많은 교육 수요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중국의 대학들도 살아남기에 고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매일 국가를 부르며 시작하는 소학교의 하루
아이가 준비물을 잊고 간 날은 복단 소학(복단대 부속 초등학교)의 교실까지 올라가곤 하는데 그곳에서 중국의 소학교 분위기를 구경할 수 있었다.
사회주의 국가라 그런지 규율이 엄격하다. 완장을 찬 선도 어린이 몇 명이 교문에서 등교하는 학생들의 복장을 점검하고 선생님들께 인사드린다.
소학 1학년 2학기 때부터 모든 아이들은 ‘소년선봉대’의 일원이 되어 2학년까지는 초록색 스카프, 3학년 이상은 빨간 색 스카프 ‘홍링진’을 매고 등교해야한다.
영화에서 북한 어린이들이 빨간 머플러를 매고 오른 손을 머리 위쪽으로 둥글게 들어올려 경례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의 특성을 나타내는 그 광경이 이곳 중국의 학교에서 매일 아침 행해진다.
우리 아이들은 한국 학교에서 매지 않던 홍링진을 아침마다 챙기느라 한동안 고생했다. 만일 홍링진을 착용하지 않고 등교하면 학급 전체 점수가 깎인다며 가던 길을 돌아오기 일쑤였다.
한 교실에는 50여명의 아이들이 비좁게 앉아 있고 등교하자마자 교탁에 그 날의 숙제장부터 제출한다. 교실 안에서 조용히 하게 되어있지만 아이들이 모인 곳이라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가 요란하다.
7시 45분이 되면 어김없이 아침 조회를 알리는 음악 소리가 울리고 아이들은 복도에 두 줄로 정렬한 다음 계단으로 내려온다. 학교 운동장이라야 타일을 깐 좁은 면적의 공간인데도 1학년에서 5학년까지 모두 자리를 잡고 늘어선다.
국기 게양대 옆에 한 학생이 서서 음악에 맞춰 중국의 국기인 오성홍기를 서서히 올리면 모든 학생들이 손을 머리 위에 둥글게 구부려 올리며 경례를 한다. 국기가 다 올라가면 손을 내리고 목소리를 합해 ‘치라이 부웬쭈어눌리더런먼!(일어나라, 노예가 되고 싶지 않은 인민들이여!)’으로 시작하는 중화인민공화국국가를 부른다.
꼬물꼬물한 1학년 꼬마들까지 소리 높여 국가를 부르는 모습을 보면 그들만의 강렬한 공동체 의식이 느껴진다. 우리는 국가를 얼마나 자주 부르는가? 어릴 적 운동장에서 공을 차다가도 게양대에서 태극기가 내려오며 애국가가 들려오면 그 자리에 멈췄던 기억이 난다.
우리가 국기 하강식 의례를 폐지한 데에도 분명 타당한 이유가 있었겠지만 어린 시절부터 국가에 대한 애국심을 주입하는 중국의 공교육 제도를 보니 그 또한 그들 나름으로 실효를 거두고 있는 듯 하다.
길 건너 맞은 편에는 중학교(고등학교도 함께 있음)가 있는데 가끔 지나가다 보면 국민 의례를 행하는 모습이 소학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상당히 위엄 있고 절도가 있어 마치 우리나라 사관 학교 생도들의 의식 진행 수준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 소학의 코흘리개들이 자라서 중고등학생이 되면 저렇게 다져지는 것이다.
이 의식이 끝나면 곧장 체육선생님과 시범 학생이 단상 위에 올라가 국민 체조를 시작한다. ‘이, 얼, 싼, 쓰 (1, 2, 3, 4...)’ 구령을 붙여가며 전교생이 맨손 체조를 한다. 우리가 예전에 중간 체조 시간이 있어 운동장에서 하던 동작과 상당히 비슷하다. 체조가 끝나면 분실물을 찾아주는 공고 등 안내 방송이 있고 학생들은 다시 줄을 맞춰 교실로 들어간다.
소학이라고 하나 각 과목별 전담 교사가 있어 매시간 교사가 바뀌며 숙제 검사를 엄격하게 한다. 최고 학년인 5학년도 매일 숙제를 적어오는 알림장이 있어 학부모의 사인을 받아 제출한다. 중학교 입학 시험이 있으므로 소학교간 학력 경쟁이 치열하여 늘 시험이 빈번하다.
학생들을 군대처럼 편제해놓았다. 반장 대신 줄 세 개 짜리 완장을 찬 대대장, 부 반장 대신 줄 두 개 짜리 완장의 중대장, 분단장 대신 줄 한 개의 완장을 두른 소대장이라 부르는데 학과 성적이 좋아야 선출될 수 있다.
우리 아이 말에 의하면 중국 아이들은 수업 중 서로 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발표하려고 애쓰는 등 대단히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한다고 한다. 아이들이 의사 표현도 분명하고 전반적으로 활발한 인상을 준단다.
중국 아이들은 대부분 순진하고 착하여 우리 아이들이 적응하는데 교우관계로 인한 어려움은 없었다. 집에 놀러온 아이들을 보니 무척 밝고 명랑하였다. ‘한 가족 한 자녀 갖기’ 정책으로 인하여 온 가족의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자라는 탓이리라.
반면 귀하게 크다보니 성정이 좀 유약하고 유치한 면이 있어(중국 남자애들은 한국 남자애들에 비해 얌전한 편이고 소학 고학년 여자아이들도 모이면 유치원 수준의 놀이를 한다고 한다) 선생님들은 아이들에게 학교에서는 집에서처럼 ‘샤오꽁주(小公主), 샤오황띠(小皇帝)’로 행동하면 안 된다고 지적하곤 한단다.
친구들은 마음에 드는데, 학교 규율이 너무 엄격하며 매사에 점수를 매기니 늘 감시 받는 것 같아 우리 아이들은 싫단다. 복도에서 뛰어도 감점, 준비물 안 가져와도 감점, 교실에서 눈 체조를 할 때 동작 몇 번 놓쳐도 감점이다. 복도마다 선도 학생이 공책을 가지고 다니며 반 점수를 적고 이를 전체 조회시간에 발표한다니 역시 사회주의 체제는 지독한 것 같다.
규율이 엄격한 만큼 주입식 교육은 철저하나 창의적인 면은 그만큼 부족한 듯 하다. 용이나 호랑이 그림 뒤에 먹지를 대고 베끼게 하거나 칠판에 그린 교사의 그림을 따라 그리게 하는 단순한 수업 내용이 많이 있었다.
컴퓨터 교육도 한국에 비해 뒤지는 것 같았다. 파란 헝겊 신을 운동화에 끼우고 들어가는 전산실에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플래쉬 만들기 정도의 간단한 수준의 수업이 이루어진다. 우리나라 아이들에게 한 두 개쯤 있는 이 메일 주소도 중국 아이들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어 수업을 대단히 강화하여 일 주일에 몇 차례나 작문을 하고 시험에도 반드시 작문이 출제된다. 1학년에 들어가 처음 발음기호를 배울 때 벌써 중국 고시 150수가 담긴 책자를 내주고 외우게 한다. 이백이나 두보의 명시가 어린 꼬마의 입에서 술술 나온다. 내가 보기엔 수업 내용이 상당히 알찬데도 국어 교육이 많이 부족하다는 자체 비판이 있다 한다.
생활과 노동이란 과목 시간에는 작지만 실용적인 것을 가르치는데 예를 들어 맞붙어 있는 모기향 떼기, 문고리 만들기, 전통 놀이판 만들기 등은 아이가 재미있어 했다. 또 정기적인 필기 시험은 중국어, 수학, 영어 세 과목에만 국한하여 아이들의 학습 부담이 적은 점도 좋았다.
그리고 교내 행사에 학부모들의 참여를 철저히 배제한다는 점도 특징 중의 하나이다. 소풍이나 학예회, 운동회 등에 일절 학부형을 초청하지 않는다. 학교에 오지 말라니 편하기도 했지만 궁금하기도 하여 복단대 소강당을 빌려서 행한 학예회를 살짝 엿보았는데 저렇게 준비를 많이 하고 잘 하는 것을 공개하지 않다니 아이들의 재주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구 억제책 때문에 한 가정 한 자녀 갖기가 정착된 중국에서 어린아이는 이제 한 가정의 보배로 여겨져서 귀한 대접을 받는다. 어릴 때부터 부모의 교육열이 대단하나 직장을 가진 엄마들을 위한 탁아소의 기능을 하여 소학교도 오후 5시경에 파하므로 일찍 하교하여 각종 학원과 과외 수업에 바쁜 우리 한국의 아이들보다는 덜 피곤한 듯 하다.
중국에서는 아직까지 공교육이 사교육보다 우위에 서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아이를 중국의 소학에 보내보고 느낄 수 있었다.
연고가 없기도 하고 또 내 중국어 실력이 취재를 할 만큼 능숙하지 못한 탓에 중국의 초중(중학교)과 고중(고등학교)을 탐방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 유감이다. 그러나 주위의 학생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소학에서 훈련한 규율과 면학 태도가 더욱 강화되고 이에 대학 입시에 대한 준비와 부담이 더해진 것이 중국 고등학교의 분위기인 듯 하다. 중국 고등학생들은 한국 학생들 못지 않게 입시 경쟁에 시달리며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여 학업에 매진하고 있다.
5. 아침 식사는 간단히
우리 아파트 앞에는 샤오탄(小灘 길거리에서 음식 파는 포장마차)이 많이 늘어서 있다. 밀가루를 길게 말아 기름에 튀긴 여우티아오(油條)와 콩을 갈아서 만든 일종의 콩국인 떠우지앙(豆漿) 등을 이른 아침 시간에 팔고 있다.
길 건너 공사장의 인부나 출근하는 회사원들이 많이 사먹는데 이 정도면 한끼 아침 식사를 해결하기에 거뜬하다.
지난 여름 방학 중국의 다른 지방을 여행하면서도 같은 것을 경험했다. 밥을 넣어 푹 퍼지게 끓인 흰죽 시판, 간장을 붓고 껍질 채 삶은 달걀 지딴, 속에 아무 것도 넣지 않은 빵 만터우, 속에 채소나 고기를 다져 넣은 만두 빠오쯔, 우리나라의 무우 장아찌 비슷한 짜차이 무침 등이 대표적인 아침 식사였다.
호텔의 뷔페라는 것도 거의 그러하고 변두리의 음식점에서도 그렇게 아침 메뉴를 준비하여 팔고 있었다. 호텔은 조금 비쌌으나 길가의 작은 음식점에서는 5元이면 4인 가족의 아침 식사가 해결되었다.
서안에서 우리가 대절했던 택시의 기사 역시 아내가 직장에 다니므로 이렇게 집 근처 음식점에서 아침거리를 사와서 먹거나 직접 나가서 먹는다고 하였다. 그 편이 조리하는 시간도 절약하고 경제적이라는 것이다.
아침에 아이들을 소학교 앞까지 태워다 줄 경우 돌아오는 길에 복단대 강의동 앞에 늘어서 있는 샤오탄들을 많이 보게된다. 중국의 대학생들은 무엇을 먹나 가던 길을 멈춰 자전거를 세워 놓고 구경해보았다.
먼저 큰솥에서 밥을(찹쌀로 지은 듯 쫀득쫀득했다) 한 숟가락 퍼내어 흰 수건을 깐 둥근 나무 도마 위에 쭉 편다. 그 다음 학생이 요구하는 대로 쏘시지, 채소 볶은 것, 러우송(고기를 가공하여 솜처럼 만든 것) 등을 밥 위에 얹고서 김밥 말 듯이 두르르 말아버린다. 그리고 수건 채로 빨래 짜듯이 양쪽에서 비틀어 단단하게 다진 후에 비닐에 넣어준다.
바쁜 학생들이 걸어가면서도 먹을 수 있는 일품 요리인 셈이다. 비닐을 벗겨 속에 들어 있는 밥을 먹으면서 생수나 한 통 사서 곁들이면 아침 식사가 끝난다. 한국의 주먹밥이나 미국의 샌드위치에 해당하는 ‘치우판(糗飯)’이라 불리는 이 간편식은 1, 2元이면 충분하다.
또 하나, ‘지딴삥(鷄蛋餠)’이라는 기름투성이 밀가루 전도 있다. 프라이판 위에 반죽한 밀가루를 한 줌 떠 납작한 칼로 죽 돌리면서 넓게 편 후에 달걀을 하나 깨서 얹고 그 위에 파 같은 생채를 뿌린다. 뒤집어 장을 바르고 여우티아오를 하나 넣어서 둘둘 말면 끝이다. 비닐봉지에 넣어 주는데 값은 1元이었다. 그밖에 한국의 호떡처럼 생긴 크고 납작한 빵도 있다.
바쁜 대학생이나 직장인이 우리 돈으로 5백원 가량이면 아침을 해결할 수 있다. 서민들의 아침 식사는 이렇게 간편하나 일반적으로 중국인들에게 식생활은 몹시 중요한 부분이다. 먹는 것을 생활의 특별한 즐거움으로 여기고 대단히 즐기므로 중국인들의 전문 요리는 다양하기 그지없다.
예로부터 세계적인 명성이 자자한 중국 요리는 우스개 소리로 자동차와 배, 비행기를 뺀 육해공의 모든 것이 음식 재료가 된다고 한다. 지역에 따라 조리법과 재료가 달라 4대권역이나 6대권역으로 나누는데 사천요리 광동요리 등의 이름은 이미 한국인의 귀에 익숙하다. 상해는 바닷가에 인접해 해산물이 풍부하다. 그리고 강남 지역의 쌀은 2모작으로 품질도 좋다.
경제 사정이 좋아지면서 중국에서도 외식 사업이 번창하고 있다. 상해의 고급 음식점은 서민들로서는 꿈도 못 꿀 고가로 실내 치장이 화려하기 이를 데 없고 주말에 예약을 하지 않으면 식사를 하지 못할 정도로 손님이 성황을 이룬다.
6. 중국에서 본 특이한 패션 두 가지
지금은 눈에 많이 익숙해진 것이 두 가지 있다. 잠옷 입고 외출한 사람들과 한 여름 더위에 윗도리를 벗고 다니는 남자들의 모습.
처음에 보았을 때는 문화적 충격이 컸다. 길거리에서 위 아래로 잠옷 한 벌을 빼 입은 중년 여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녀는 개를 데리고 태연히 거리를 산책하고 있었다.
잠옷의 소재는 실크 종류가 아닌 투박한 면 종류였다. 주머니 달린 큰 상의에 바지. 눈을 비비고 아무리 보아도 우리가 잠 잘 때 집안에서만 입는 잠옷이었다. 혹 이 사람이 특이한 사람인가 주위를 둘러보아도 모두들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지하철에서 흰 레이스 달린 속치마를 겉치마로 입고 있는 여성을 본 일도 있다. 깜짝 놀라 다시 보니 틀림없는 속옷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은 나 외에 아무도 없었다. 나 혼자서만 민망해하다 말았다.
아, 이것이 중국인, 특히 상해인들의 옷 입는 습성인가 보다 혼자서 결론을 내리고 그 다음부터는 잠옷이나 속옷 차림의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오랜 관념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었다. 상당한 시간이 흘렀는데도 적응이 잘 되지 않았다.
대형 할인점의 밝은 네온 불빛 아래서 만난 어떤 부부는 커플로 잠옷을 입고 있었다. 점잖게 생긴 부인은 미장원에 다녀온 듯 고데로 컬을 낸 우아한 머리 모양에 검은 색 구두까지 신고 있었다. 잠옷에 슬리퍼가 아니라 그들로서는 간편복에 구두를 착용한 것이다.
집 앞 골목에서 우리 아이들의 소학 담임 선생님인 띵 라오셔를 만났다. 체육과 도덕을 가르치는 그분 역시 아들의 손을 잡고 편안한 잠옷, 아니 간편복 차림이었다. 그 모습에 내 눈을 다시 한번 단련시켰다.
중국의 시장에 가보면 면으로 된 잠옷을 많이 팔고 있다. 그들에게는 잠옷이 그냥 잠옷이 아니라 추리닝이라 부르는 우리의 운동복에 해당하거나 가벼운 외출도 가능한 실내복의 개념인 것이다.
아이들은 역시 어른보다 현지 적응이 빨라서 어느 결에 저희들도 잠옷을 입고 집 근처 슈퍼나 문구점에 다녀오고자 했다. 그러나 나는 다 큰 아이들이 그건 안 된다고 말렸다. 남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은 좋으나 엄연히 우리 정서에 맞지 않는데 그걸 따라할 필요는 없다고 잘라 말하니 아이들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나도 신세대 엄마는 아닌가 보다.
상해의 여름은 습하고 더웠다. 아무리 가난한 집도 에어컨은 달아 놓고 살 정도로 무더운 날씨인데 거리에서 쉽게 마주치게 되는 모습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웃통 벗은 남자들이다.
땀 흘리는 일을 하는 근로자이거나 등산을 하다가 순간적으로 더위를 못 이겨 속옷을 벗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일상 생활 속에서 태연히 내의까지 몽땅 벗어 젖히고 유유히 생활하는 사람들을 보니 참으로 당혹스러웠다.
상해만 그런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마침 북경도 이번 여름에 몹시 더웠는데 여행중 거리에서 마주친 남자들 중 웃옷을 입지 않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고 시 외각으로 갈수록 더 심했다. 이쯤 되면 웃통 벗은 것도 의상의 하나로 쳐야하나? 벌거숭이 임금님도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집 근처의 허름한 이발소에서 이발을 했다. 보통 이발비가 10元 정도인데 그 곳은 특별히 싸서 5元에 해주었다. 값이 싼 만큼 머리를 감겨주지 않아 이렇게 머리카락이 떨어지는데 어떻게 셔츠를 입고 집에 가냐고 했더니 주인 왈, ‘웬 걱정이요? 내의까지 여기서 마저 벗고 그냥 가시오.’ 하더란다.
어디서나 훌렁 훌렁 벗어버리면 그만인 것이 남자의 특권이라면 한편, 그럴 수 없는 우리 여자들로서는 부럽기도 하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데는 공중도덕이 있고 그 모습이 미관상 아름답지 않은 것은 확실하므로 중국 정부에서도 이 관습을 없애려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북경 올림픽을 개최할 중국인지라 외국의 시선을 의식하여 신문 등에 옷을 벗지 말자는 캠페인을 펼치고 거리에서 웃통을 벗은 남자들을 카메라로 찍어서 공개하는 등 보다 강력한 대책을 마련하고 있단다. 그러나 사람의 습성이란 것이 단시일에 변할 리는 없을 것이다. 좀 더 시간이 지나야 할 것인지... 편하겠다고 부러워할 한국 남성들은 없을지 모르겠다.
7. 어디서 사나
현재 중국인들의 주거 형태는 대부분이 아파트이다. 상해에도 대도시의 추세대로 ‘~화웬(花園), ~꽁위(公寓)’이라 부르는 아파트가 많다. 우리 눈으로 보면 재개발 대상인 몇 십 년 된 낡은 아파트도 있고 새 아파트도 속속 지어지고 있다.
푸동 같은 신개발 지구에는 호화로운 대형 빌라와 고급 아파트들이 즐비하다. 그곳에서는 완전히 서구화된 주택 양식을 볼 수 있고 외양이 그림처럼 아름다워 신천지 같다. 외국인들도 중국 주택을 구입할 수 있으므로 외국 자본도 이곳의 부동산 시장에 많이 영입된다.
빈부 차이가 극심한 중국이니 만큼 주거 환경에도 현저한 차이가 난다. 도로변의 서민 주택을 들여다보면 어둡고 습기 찬 낡은 벽돌 건물에 여러 명이 살며 밖으로 난 작은 수도에서 세수를 하고 빨래를 하여 지나가는 행인들 머리 위로 속옷이 나부끼게 한다.
서민 아파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거실은 좁고 방과 모퉁이가 많아 답답하게 느껴지며 베란다에 샤시가 없어 바깥바람이 그대로 몰아친다. 좀 낡은 아파트촌을 지나가면 창 밖으로 길게 빼놓은 여러 개의 대나무 빨래대가 눈에 띠는데 도시 미관상 좋지 않은 경우 관청에서 제재하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 짓고 있는 아파트는 대부분 현대식으로 외관이 깔끔하며 건물 양식이 비슷하고 외벽에 즐겨 도색하는 색상은 분홍색과 소라색, 미색 등으로 밝은 느낌을 준다. 곳곳에 신축하는 아파트가 많아 대도시다운 면모를 보인다.
상해의 아파트는 한국적인 개념의 난방이 안된다. 바닥을 데워주는 중앙 집중식 혹은 개인 조절식 보일러가 아예 없다. 보통 바닥재는 나무나 대리석 등을 쓰므로 체감 온도가 더 떨어진다. 그러면 추운 겨울을 어떻게 나는가?
지난 3월, 비가 자주 와서 흐리고 습한 상해의 날씨에 적응이 안되어 혼이 났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어떻게 지내느냐고 숙소의 복무원에게 물으니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를 가지고는 규정을 어길 수 없다면서 별 대책을 세워주지 않았다.
양쯔강이남 지역은 따뜻한 곳이니 난방 시설을 하지 말라는 당의 지시가 있은 이후에는 웬만큼 추워도 견딘다나.
먼저 와 있던 한국 아줌마가 알려 주었다. 상해의 서민들은 세 가지로 겨울을 난단다.
첫째, 집 안보다 집 밖이 더 따뜻하니(중국인들은 집의 안, 밖 기온이 차이가 많으면 감기 걸리기가 쉽다고 생각한단다) 햇살이 비치면 건물 밖으로 나와 햇볕을 쬔단다. 그러고 보니 양지 바른 담장 밑에 옹기종기 사람들이 모여 있는 중국 사진을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나도 아이들이 학교 간 후 따뜻한 집 밖으로 나와 산책하며 햇볕을 쬘 수밖에.
둘째는 옷을 많이 입기. 중국 여자들은 수시로 앉아서 손뜨개질을 한다. 실을 파는 가게도 많다. 두꺼운 털실로 옷을 짜서 가족 모두가 두둑하게 입고 겨울을 난다고 한다. 뜨개질을 잘 못하는 나는 이번 겨울을 어떻게 넘길까 걱정이다. 시장에는 솜을 타서 이불을 만들어 주는 곳도 있다는데 아마 그곳을 들러야 할 것 같다.
셋째, 운동하기이다. 아침에 도로에 보면 조깅하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띤다. 손바닥을 비벼 얼굴을 문지르거나 팔 다리 운동을 하는 노인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운동으로 추위를 이긴다?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뜨뜻한 바닥 난방 시설에 익숙해 있는 우리로서는 그 정도로는 안심이 안된다.
요즘도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면 훈훈한 한국의 아파트가 그립다. 얼른 벽에 달려 있는 작은 콩티아오를 틀지만 차가운 공기가 데워지려면 시간이 걸리고 양에 차지도 않는다. 썰렁한 마루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중국인들은 어떻게 견디나 신기하기만 하다. 이만한 날씨는 추위로도 여기지 않으니... 우리보다 더위와 추위에 강한 사람들인 것은 분명하다.
물론 중국에도 전기 장판과 난로 등 난방 기구가 있고 에어컨디셔너로 실내 온도를 조절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우리와 주거 형태가 다르다. 중국은 침대, 의자를 사용하는 입식 문화이고 우리는 온돌방에 앉아서 생활하는 좌식 문화이다. 그래서 한국인들이 중국의 방을 세 얻으면 먼저 장판을 깔거나 심지어 보일러 시공을 하기도 한다.
이 곳은 방을 세 놓을 때 모든 시설을 갖추어 놓는다. 침대, 냉장고, TV, 세탁기, 주방 기구가 구비되어 있으며 이들 설비는 사용에 따라 마모되므로 다음 번에는 전세비가 내려간다. 자기 물건을 가지고 입주하고 매번 전세 값이 오르기 마련인 우리네와는 다른 방식이다. 그리고 계약을 할 때는 반드시 한 달 치의 세를 야찐(보증금)으로 내어야한다.
중국 가정이나 가게의 출입문에 마름모꼴의 종이 위에 씌어진 붉은 색의 ‘福’자가 거꾸로 붙여져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복이 들어오기를 기원하는 것은 알겠는데 왜 바로 붙여놓지 않고 거꾸로 붙여 놓았나 궁금하여 중국 친구에게 물어 보았다.
복이 오다는 ‘福到’인데 오다, 도착하다라는 뜻의 ‘到’와 거꾸로란 뜻의 ‘倒’가 동음이어서 ‘到’를 쓰는 대신 ‘福’자를 거꾸로 붙인단다. 또 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니 그렇게 거꾸로 붙이는 것이 이치에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전통 복장을 한 통통한 남녀 어린이 한 쌍이 웃으며 두 손을 맞잡고 ‘꽁시(恭禧)’ 하고 있는 그림도 우리에게 친숙하다. 중국인들은 이 그림을 명절 때나 혹은 평상시에도 아파트 출입문과 창문에 잘 붙여 놓는다.
현재 우리가 사는 집은 가끔 영화 촬영지로도 이용되는 서구식의 새 아파트인데도 창을 열면 반대편 집의 창문에 붙여진 중국 고유의 동자 그림을 볼 수 있다. 아파트 단지 입구 정문에는 중국 전통의 ‘홍등’을 달아 놓았다. 지난 국경절 이래 계속 걸려 있는 이 붉은 등 네 개도 역시 복을 비는 습속의 하나이다.
8. 가래침쯤이야
이 글을 혹 중국인이 본다면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어떤 중국 교수가 회식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중국인들이 거리에 가래침을 많이 뱉는다고 다른 나라에서 말들이 많은데 대신 길바닥에 껌은 없지 않으냐, 미국에 가보면 껌이 덕지덕지 붙은 도로도 많다. 이 모든 것은 문화적인 차이일 뿐이다라고.
그렇다. 그의 주장대로 이것은 문화적인 차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외국인이 이 차이에 익숙하게 되는데는 시간이 한참 걸린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이 습관을 가졌는데 중국인들에게는 타인의 면전에서 큰소리로 가래침을 뱉는 일 자체를 실례로 여기지 않는 공통 정서가 있는 것 같다. 차를 타면 운전 중인 기사가 ‘칵’ 소리를 내며 창 밖으로 침을 뱉는 일이 다반사이고 승객들도 마찬가지이다. 수업중의 교사도 학생들 앞에서 서슴없이 소리내며 휴지통을 찾는다. 한번은 마이땅라오(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시켜놓고 앉아있던 대학생 풍의 발랄하고 예쁜 아가씨 입에서도 그런 소리가 나기에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좁은 기차 안에서는 더욱 심하다. 잉워를 타고 가다가 식사시간이 되어 컵 라면에 물을 부어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우리가 있던 곳이 휴지통과 가까웠는지 오가는 사람 대 여섯이서 연달아 소리를 내며 침을 뱉았다. 그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 가족은 귀를 막아야했다. 갑자기 식욕이 떨어졌음은 물론이다. 옆자리의 중국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맛있게 먹었지만.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 문화 및 자연 유산에 등록되어 있는 황산에 갔을 때였다. 이야기 잘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노인 내외나 여유 있는 도회풍의 젊은 커플이나 가래침을 뱉는 데서는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앞서 가던 우리 아이들이 ‘거기 밟지 마세요’ 하고 소리치면 뒤에서 우리 부부는 피해가곤 했다. 돌계단 군데군데가 등산객들이 뱉은 침으로 미끈거렸다.
중국인들은 왜 그렇게 가래침을 많이 뱉나?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기 때문인가 싶어 물어보았더니 주위의 한국인이 말하기를 자신도 상해에 와서 가래침 뱉는 횟수가 늘었다며 공해 때문이 아닐까 라고 대답한다. 또 어떤 이는 중국인들이 침을 많이 뱉는 이유는 담배를 많이 피우기 때문이라고 나름대로 분석한다.
중국은 담배 천국이다. 사람들, 특히 남자들이 모여서 쉬고 있는 곳에는 접근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 각자 뿜어내는 담배 연기가 엄청나다. 세계적인 관광명소인 무이산, 황산의 비경을 앞에 두고 그 맑은 공기를 오염시키는 담배 족들이 못마땅했지만 그들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비흡연자인 여성들까지도 가래침을 잘 뱉는 것을 보면 이도 정답이 아닌 듯하다.
거리에서 가래침 뱉는 일이 줄어들지 않으니 곳곳에 이를 금하는 안내문을 써놓았다. 버스 정거장, 지하철 역 승강장, 공원, 학교 교정 등 도처에서 ‘不隨地吐痰(아무데나 가래침 뱉지 마시오)’을 볼 수 있다. 공공 규칙들 중 처음에 이 구절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정부에서도 이 습관을 근절키 위해 여간 노력하지 않는 것 같다. 이제 많이 없어졌다지만 아직도 주변에서 그런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어쨌든 중국에 오면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 난데없이 들려오는 ‘카악’ 하는 소리에 익숙해지도록 하고 길을 걸을 때는 바닥을 잘 살펴보고 가는 것이 좋겠다. 혹 우리에게도 외국인이 쉽게 적응할 수 없는, 몸에 밴 우리만의 습관이 없나 모르겠다.
9. 중국에 부는 한류 열풍
이전에 살던 복단대 외국인 전용 숙소 부근의 담벼락에는 커다랗게 ‘I ♡ N.R.G’가 씌어 있었다. 방금 상해에 도착해 모든 것이 낯설던 터라 한국과 연관 있는 그 낙서가 반갑기 짝이 없었다.
그 이후 우리는 생활 주변에서 이미 중국에 들어와 유행하고 있는 한국인들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우선 연예계의 스타들이다.
대형 할인점 따룬파에 갔을 때 귀에 익은 한국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이들이 얼른 ‘장나라다.’ 소리쳤다. 1층에 각 종 음악 CD와 영화 DVD, VCD 등을 판매하고 있었는데 한국의 앨범이 많이 있었다. 우리 아이들은 한국에서 가져오지 못했던 GOD CD를 하나 샀다.
도로변의 광고판에는 빨간 치파오를 입은 김희선이 휴대폰 전화를 들고 있었고 거리의 문구점에는 강타나 장동건의 브로마이드가 진열되어 있었다. 예를 들자면 한이 없다.
아이들과 함께 그동안 중국 텔레비전에서 본 한국 드라마도 한 두 편이 아니다. 가을 동화, 토마토, 목욕탕 집 남자들, 호텔리어 등등...
특히 가을 동화는 ‘치우티엔통화(秋天童話)’ 혹은 ‘란써셩쓰리엔(藍色生死戀)’ 이란 제목으로 대단한 인기 속에 방영되었는데 가만히 보니 그 인기의 비결을 알 수 있었다. 우선 극중에 흐르는 정서가 동양인의 정서에 맞게 애절하고 주인공들의 연기나 그림같이 아름다운 화면이 중국인들을 매료하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 더빙이 우수하였다. 미국 영화를 중국어로 더빙한 것을 보았는데 아무래도 입 모양이나 길이가 달랐다. 그런데 가을 동화는 배우들이 마치 중국어를 하는 것처럼 문장의 길이가 정확하게 끊어졌다. 중국어 성우의 음성 연기도 자연스러웠고 목소리도 실제 우리 배우와 비슷하였다. (나는 아직도 원빈의 약간 비음 섞인 음성을 기억한다.)
안재욱에 대해서는 말 할 필요도 없다. ‘안짜이쉬’를 외치는 팬들이 엄청 많다. 그가 출연한 영화가 텔레비전에 여러 번 방송되고 최근에는 중국 드라마에도 주연으로 출연했다. ‘바이링꽁위(白領公寓 화이트 컬러가 사는 아파트라는 뜻)’라는 현대 멜러물인데 그를 제외하고는 모두 중국배우이며 대사도 당연히 중국어이다.
관례대로 중국성우의 더빙을 입혀 그의 실제 음성은 들을 수 없지만 입 모양이 정확하게 중국어 대사와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니 열심히 대사를 외웠을 그의 수고가 느껴졌다. 중국어는 4성조와 발음이 독특하여 배우기가 그리 녹녹치 않은 언어지만 한국의 여러 스타들이 중화권으로 진출하기 위해 중국어 학습을 열심히 하고 있다한다.
우리 큰애가 한동안 즐겨 보았는데 드라마가 끝나고 자막이 오르면 맨 위에 안재욱의 이름이 나오고 괄호 안에 한국인이라 밝혀져 있었다. 우리 애 말이 드라마는 재미없는데(그러나 중국 내에서 시청률이 상당히 높은 인기 트렌디 드라마였다) 한국인이 중국 드라마에서 주연을 하는 것이 대단하므로 애국심 차원에서 본다나 어쩐다나. 이 드라마는 한국에서도 ‘아파트’라는 제목으로 방영될 것이란 이야기를 들었다.
스타에 열광하는 10대들은 한국인에 대해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여행길에서 만난 중고등학생들은 우리 가족이 한국인인 것을 알면 사진을 같이 찍기를 원한다.
한국 상품에 대한 호감도가 상당히 높다. 처음 중국어도 잘 못하는 우리 아이들이 소학에 입학했을 때 친구들이 친절하게 대해준 것도 한류 열풍을 통하여 한국 상품에 익숙한 덕이
컸다. 학교 앞 문구점에서 ‘아침해살(햇살이 아님)’이라는 유사 한국 상표의 볼펜이 팔리며 엽기 토끼 마시마로는 ‘리우망투(깡패토끼쯤 됨)’라 불리며 인기를 누리고 있으니.
우리 애 친구 중에 꿍옌이라는 아이가 문구점에서 한국 색종이를 하나 샀는데 비닐 봉지에 쓰인 500이란 가격 표시를 보고 500장이 들었다며 좋아하더란다. 만져보면 알텐데 어찌 그리 바보 같을까 하고 우리 작은애가 웃자 큰애는 중국 애들이 그만큼 순진하다는 뜻이라고 얼른 제 친구를 두둔하였다.
한국 제기도 중국 아이들에게는 굉장한 인기 품목이다. 중국 제기는 뻣뻣한 깃털이 달려 있어 잘 차지지 않는데 한국 제기는 가벼워서 차면 털이 착착 눕는다고 중국 아이들이 너도나도 원하는 바람에 우리 아이가 학교에 가지고 갔던 30여 개의 제기가 금방 동이 났다.
작은 문방구에서도 한국 상품이란 이름이 붙으면 중국 것보다 1, 2원 씩 더 받는다고 한다. 이러니 어찌 한류열풍으로 얻는 이득이 적다 하겠는가?
그러나 요즈음은 한류열풍에 대해 중국 정부가 긴장한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한국인들이 들어와 연예계를 휩쓸고 중국 경제에 타격을 줄까봐 이를 경계하는 움직임이 있다고 여행 중 만난 한 북경 거주 한국 유학생이 말하였다.
월드컵 때 한국 축구에 대해 지나치게 배타적이었던 것에는 축구 종주국(역사상으로 보아 영국보다 앞섰다고 함)으로서의 무너진 자존심이외에도 과도한 한류열풍에 대한 중국 정부의 위기감도 한 몫을 했을 것이라고 그는 지적하였다.
그의 이야기가 사적인 의견인가 했더니 후에 인터넷에서 그와 비슷한 기사를 접할 수 있었다. 한류열풍에 대한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면서 계속 한국의 연예 문화를 진출시키기 위하여 한국의 유명한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중국 본토의 신인 가수들을 발굴하여 한국 자본과 기술로 훈련시킨 뒤 다시 중국 시장에 내놓는다는 안이었다.
김민이 북경에서 중국 영화를 찍으며 인기가 대단했고 차인표도 영화를 찍기 위해 11월에 상해로 오므로 그들의 현지 팬들이 설레고 있다는 최근의 소식도 들린다. 한편 중국배우의 한국 연예계 진출도 있어 역 한류열풍이 예상되며 중국 텔레비전의 프로그램을 전문적으로 방영하는 한국 채널도 생긴다니 역시 교류의 속성은 일방성이 아닌 쌍방성인가 보다.
올해로 한중 수교 10주년을 맞았다. 이 지구촌 시대에서 나라간의 교류가 없을 수 없고 지리적,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는 한․중 두 나라의 교류는 불가피한 현실이다.
현재까지는 중국과의 교류가 주로 연예 분야에 국한되고 그 또한 체계적이고 지속적이지 못한 점 등 문제점이 많이 지적되고 있는데 힘써 개선해 볼 일인 것 같다. 앞으로 경제 교류, 학술 교류, 예술 및 문화 교류 등 다방면에 걸친 알찬 교류가 있기를 기대한다.
10. 중국 여성이 살아가는 법
샤오싱(소흥 紹興)은 작지만 조용하고 아담한 문화 도시이다. 중국의 대표적 문인인 루쉰(魯迅)의 고향이자 명필 왕휘지의 난정, 명대의 학자 왕양명의 묘소와 우임금의 사당 대우릉 등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들보다도 잊을 수 없는 한 인물이 있으니 청말의 여류 혁명가 치우친(추근 秋瑾 1875-1907)이다.
‘休言女子非英雄 夜夜龍泉壁上鳴’
‘여자는 영웅이 아니라 말하지 말라, 밤마다 용천검이 벽 위에서 운다.’
처음 이 구절을 소흥의 중심가 도로 위에 세워진 입 간판에서 읽었을 때 느꼈던 그 전율과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얼른 수첩을 꺼내어 그 시구를 적어 두었다.
소흥은 추근의 출생지이다. 청말 격변기에 국가의 위기를 느끼자 평탄한 개인의 행복을 박차고 일본으로 유학간 그녀는 손문이 이끄는 동맹회에 가입하여 본격적인 혁명대열에 선다. 귀국 후 한족의 부흥과 국권을 회복하자는 구호를 내걸며 동지들과 무장 투쟁을 하다가 체포되어 29세의 젊은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항주의 서호 고산에서 본 그녀의 무덤과 그 위에 세워진 동상이 생각났다. 청초한 미인의 용모를 가졌으나 그 얼굴에는 매서운 기상이 서려 있고 긴칼을 짚고 있는 그녀의 동상 전면에 손문의 친필로 ‘건괵영웅(巾幗英雄)’이라 씌어 있었다.
건괵은 수건이니 여성을 상징하는 물건이다. 그러므로 건괵영웅은 여장부, 여걸이란 뜻이리라. 중국인들이 여성의 뛰어난 능력을 이야기할 때 수건이 수염보다 낫다는 표현을 한다.
그러나 역사상 ‘수염’들은 결코 ‘수건’들을 인정해 주지 않았다. 항상 비주류로서 삶의 애환과 굴곡이 많았던 여성들이다.
북경의 판지아웬은 골동품 시장인데 그 곳에서 오랜 세월 중국 여성들을 고통과 슬픔으로 잡아 메었던 족쇄 하나를 발견했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니 작아서 손을 채 가리지 못하였다. 뾰족한 앞 끝을 따라 부자연스런 선을 그리며 볼록하게 위쪽으로 모인 형태에다 표면이 몹시 딱딱한 그것은 ‘전족화’였다.
신이라기보다는 마치 장난감 같았다. 수를 놓은 비단 천이 겉에 대어져 있어서 비단주머니 같이도 느껴졌다. 말로만 듣고 글로만 읽었던 전족화를 직접 보니 실로 기분이 묘했다. 세상에, 다섯 살짜리 아이도 신으면 딱딱해서 발 아프다고 투정부릴 듯 한 이런 신발을 다 큰 어른이 신었다니...
샌들 위에 편안하게 얹혀 있는 큼지막한 내 발을 내려다보니 이것은 ‘사람의 신체에 도저히 맞춰질 수 없는 불가능한 물건’ 이었다. 가슴이 저려와서 한동안 그 전족화를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중국의 귀족 집안에서는 여아가 태어나면 3, 4세부터 발을 묶었다. 엄지발가락만 제외한 나머지 네 발가락을 아래로 꺾어 넣어버리고 천이나 가죽으로 발을 꽁꽁 동여매는 것이다.
뼈가 부러지고 살이 썩어 피고름이 흐르는 아픔은 말할 것도 없고 발을 디딜 때마다 이 구부러진 네 발톱이 발바닥 안을 파고드는 고통은 무덤에 들어가서야 벗어날 수 있었다.
3년에 걸쳐 천을 감고 돌을 얹어 발가락뼈를 부러뜨리고 발등을 공처럼 휘어지게 굽혀 모양을 잡은 뒤에도 평생 발을 졸라매야 하며, 그래서 다 자란 성인의 발 크기가 10센티미터 정도에 불과하여 어린애처럼 뒤뚱거리며 걷게 만드는 이 잔인한 풍속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펄벅 여사의 ‘대지’를 읽어보면 왕룽의 아내 오란이 어린 시절 불우한 환경 탓에 자신은 하지 못하여 일생 한이 되었던 전족을 둘째 딸에게 시킨다. 전족은 하는 이에게나 하지 못하는 이에게나 똑 같이 고통을 준 무서운 관습이었던 것이다.
남성의 즐거움을 위하여 여성의 인체를 억압한 이 악습은 1902년경에야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폐지를 논하기 시작하였으나 송대 이후 민간에까지 뿌리깊게 자리잡은 관습이라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1917년에 비로소 법으로 폐지되었으나 놀랍게도 전족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은 중화민국이 서고도 20여 년이 더 지난 1930년대 초였다. 그러므로 현재 70세가 넘은 노인들 중에는 어린 시절 전족을 한 경험이 있는 이도 필경 있을 것이다.
추근은 이 전족을 폐지하고자 노력한 여성운동가이기도 하였다. 추근의 평생에서 혁명 활동과 여성 운동은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이 전족법과 마찬가지로, 가난이 극에 달하면 돈을 받고 여아를 파는 풍속 또한 가부장제와 남아선호사상에 물든 과거 시절에 여성에게 주어진 삶이었다. 이들 습속은 ‘그 당시 중국에서 여성으로 사는 법’이었으므로 누구든 그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성이라 하여 역사 속의 영웅이 절대로 될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지난 세월, 중국 평균 여성의 삶은 남성의 그것에 비해 몹시 고단하였으나 그 가운데서도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위대한 여인들이 분명 있었고 그 자취들을 지난 여름 중국을 여행하면서 더듬어 볼 수 있었다.
중국 유일의 여제였던 측천무후의 무덤인 건릉이 서안에 있었고 당나라의 경국지색 양귀비의 무덤과 그녀가 목욕을 즐겼다는 화청지도 가보았다. 내몽고의 호화호특에서는 한나라 후궁으로 화친 정책에 의해 흉노족의 왕비가 된 왕소군의 무덤이 있었다.
역사상 권력을 향유했던 여인들이다. 측천무후는 당나라의 맥을 일시 끊고 주나라를 세워 15년 간 통치했던 정치가였고 양귀비는 왕의 총애를 받아 가문이 부귀영화를 누렸으므로 열 아들보다 딸 하나가 낫다는 세간의 부러움을 받았다. 한족으로 흉노족의 왕비가 된 왕소군은 일신을 희생하여 나라의 평화에 기여한 인물로 당대와 후세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문인의 자취도 더듬어 보았다. 소흥에는 심원이란 정원이 있는데 이곳은 남송 때 시인 육유와 여류 시인 당완의 애틋한 사랑이 깃든 곳이다. 부부였으나 시어머니의 반대로 이혼을 한 후에도 더욱 그 정을 잊지 못하고 있다가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이 정원에서 재회하게 된 두 사람이 나눈 사랑의 노래는 오늘날에도 인구에 회자되는 명편이다.
조선조의 여류 시인 허난설헌과 자주 비교되는 이청조는 산동성 제남 사람이다. 여행중 우연히 들르게 된 제남에는 이청조가 아침마다 세수하였다는 ‘수옥천’의 맑고 시린 물이 아직도 흐르고 있었고 그 옆에는 이청조 기념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청조는 송 대의 사(詞: 시와 함께 중국 문학의 대표적 운문 장르) 작가로 그녀가 남긴 주옥같은 작품들은 지금도 여류 문학의 최고봉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밖에 내가 가보지 못한 저 넓은 중국 땅 깊숙이 여성의 자취가 구비 구비 숨어 있을 것이다. 대지의 상징은 여성이 아닌가? 역사적 시대적 환경이 재능 있는 수많은 여성들을 인정하지 않았던 과거와는 달리 오늘날 중국 여성의 위상에는 많은 긍정적 변화가 있다.
같은 아시아 문화권에서 한국이나 일본보다 중국 여성의 지위는 높다고 한다. 한국의 텔레비전에서도 이 문제를 특집으로 다룬 바 있었다. 마침 중국에 있어 시청하지는 못했지만 주변의 중국 여성들을 살펴보아도 그런 것 같다.
각 회사의 책임자인 경리도 여성인 경우가 많고 소학교에도 거의 여교장이 배정된다. 사회적인 지위가 높아진 것은 분명하여 현재 여성들은 대학에 다니고 인민해방군에 복무하며 공산당에 참여하는 등 남자와 동등한 일을 수행하고 있다.
대부분의 도시 여자들과 많은 농촌 여자들은 직장에 다닌다. 따라서 도시와 농촌에서는 탁아소가 건립되어 있고 소학에서도 일하는 엄마를 위하여 아이들을 오후 5시까지 학교에 머무르게 한다. 일하는 여성에 대한 정책이 한국보다 잘 수립되어 있는 것 같다.
함께 직장에 다니는 만큼 남성들의 가사 조력도 한국에 비해 월등히 높다. 처음 상해에 와서 복단대 한 노 교수의 집에 초대되어 갔을 때 머리가 희끗희끗한 그 분이 부인을 놔두고 직접 주방에 들어가 탕을 끓여 내오는 모습에 내심 놀란 적이 있다. 그 후 우리가 사는 아파트에서도 저녁 무렵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하는 남자들을 창문을 통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임금의 불균형, 소수의 고위 관리직, 가사 노동과 가정 폭력, 남아 선호 사상 등 여러 문제점들이 아직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여성의 노동력을 중시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활기차게 일하는 여성의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지금 아침마다 자전거 타고 등교하는 교복 입은 여학생들이 얼마 후에는 직장인이 되어 숙녀복을 입고 자전거로 출근할 것이다.
작은 이슬이 떨어져 마침내 큰 바위를 뚫듯이 각 개인의 성실하고 부단한 노력으로 사회의 모순과 구습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중국 여성보다 더 총명하고 유능한 한국의 여성들도 부단히 노력하여 능력을 개발한다면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밝혀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열 수 있을 것이다. 경상의 딸들이여! 힘을 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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