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학에 다니는 아이들이 여름방학을 맞자 가족 모두 배낭 하나씩을 메고 여행길에 올랐다. 상해를 벗어나 중국의 여러 도시와 농촌을 여행하며 중국의 역사와 자연,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일자 : 6. 30~7. 26
이동 경로 : 상해→태안→곡부→추성→태안→제남→북경→승덕→북경→호화호특→포두
→호화호특→서안→낙양→정주→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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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자연과 역사와의 만남인 동시에 인간과의 만남이다. 한 달간의 여행 동안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이들 가운데 관광지를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정리해 보았다.
♧ 호객꾼 ♧
승덕 버스정류장.
북경에서 버스를 타고 4시간 가량 달려 하북성 승덕에 도착했다. 승덕은 청나라의 여름 별궁인 피서산장이 면적의 40%를 차지하는 조그만 도시이다. 소형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에워싼다. 소위 ‘삐끼’라는 호객꾼이다. 숙소나 관광차편을 알선해주겠다며 이끈다. 객실 전경을 찍은 사진첩을 들고 ‘칸이시아(看一下 한번 봐라)’ 외치며 따라 붙는다. 아무리 ‘뿌야오(不要 필요없다)’ 해도 그 중 한 아주머니는 끝까지 따라왔다. 택시를 타려 하자 그 택시기사에게 내 손님 건드리지 마라는 식으로 눈짓을 했다. 이에 남편이 화난 표정으로 대응하자 그때서야 하는 수 없다는 듯 물러난다.
기차나 자동차에서 내릴 때면 우리는 늘 긴장했다. 서로 손을 꼭 잡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미지의 생활인들을 맞이할 채비를 해야 했다. 그 어떤 친구가 이보다 더 열렬하게 우리를 환영할 수 있을까? 그들은 개찰구 앞 울타리 창살에 얼굴을 끼우고 바라보고 있다가 우리가 역사를 빠져나가자마자 순식간에 에워싸 버린다. 그들 가운데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으며, 말쑥하게 차려입은 사람도 있고 입성이 허름한 사람도 있는데 정주의 중년 여자 호객꾼들은 회사원처럼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예전에 소흥에서는 호객꾼 아저씨를 피해 예정에 없던 버스를 탄 적도 있다. 택시 정류장에까지 따라오는 그를 피할 길이 없어 하는 수 없이 가까이에 정차해있던 버스를 탔다. 차마 버스에는 같이 오를 수 없었던 그는 차가 출발하기 전까지 우리 좌석의 창 밑에 서서 우리가 다시 내리기를 기다렸다. 햇볕에 검게 그을린 얼굴과 거친 손으로 미루어 이 일을 하기 전에는 농사를 지었던 듯, 검은 그의 얼굴에는 영악함보다는 아직도 농군의 순박함이 엿보였다. 게다가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땡볕에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니 무작정 각박하게 굴 수도 없는 터라 이래저래 고민이었다.
관광지나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는 항상 호객꾼이 있었다. 중소도시가 특히 심하고 대도시는 정도가 덜했다. (그러나 북경과 상해에는 호객꾼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산동성의 소도시 태안에서 호객꾼에게 엄청 시달리다가 성도(도청소재지)인 제남에 이르니 그때 따라 한 사람도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다. 너무나 확연한 차이였다. 역시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 손쉽게 시작하는 일이 호객일인가보다. 그러나 그것은 몹시 험한 일이었다.
우리에게도 호객꾼들을 피하는 방법이 생겼다. 처음에는 ‘뿌야오(不要)’로 일관했는데 점차 꾀가 늘어 ‘워먼이징띵하오러.(我們已經訂好了 우리는 이미 예약해 두었다)로 피할 수 있었고 가장 효과적인 말이 워먼주짜이쪌리(我們住在這里 우리는 이곳에 산다)였다. 물론 가족 중 가장 발음이 나쁜 나는 입을 다물었다. 처음엔 멋모르고 ‘뿌야오’ 라 세게 고함을 질렀는데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는지 우리 아이들이 한동안 나를 뿌야오 엄마라고 불렀다.
처음 몇 번 제의에 응해본 경험에 의하면, 그들이 소개하는 숙소나 차량은 대체로 기대에 못 미쳤다. 그 뒤부터 일관되게 그들을 거절하였지만 마음이 그리 편하지는 않았다. 호객하는 일이란 것이, 인구는 많고 직장은 모자라는 상황에서 생겨난 신흥 직업이고, 호객꾼들 각자는 생업에 종사하는 생활인이기에 그들을 만날 때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인간적인 갈등이 생기곤 했다.
♧ 일일유(一日遊) 택시 기사 ♧
서안.
‘리시엔셩(李先生)!’ 굵은 저음의 그가 부른다. 옆자리에 앉은 남편은 바짝 긴장하는 눈치다.또 어디를 데려가려고 저렇게 부를까?
대안탑을 가기 위해 호텔 앞에서 우연히 타게 된 택시의 기사였다. 그와 하루 차 대절 계약을 했다. 120원을 지불하면 하루동안 어디든 우리가 가고자하는 관광지로 태워준다는 것이다. 저렴한 가격인데다 차와 기사를 빌리는 것이 시간 빠듯한 우리 형편에 적합했으므로 그의 제의에 응했다. (다른 택시기사에게도 가격을 알아보니 하루 렌트 요금이 200원이라 하였다. 80원짜리도 있긴 했다.)
다음날 아침 호텔 앞에서 그는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는 그의 택시에 올랐다. 그런데 목적지인 병마용박물관에 가기도 전에 그는 우리를 보석점으로 데리고 갔다. 손님을 데리고 가기만 하면 상품구입여부와 상관없이 10원을 받는다고 솔직히 털어놓으니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차 대절료가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했더니 이런 식으로 충당하려 했나보다.
갈 곳은 많고 시간은 없고 결국 남편이 안을 내었다. 세 번째로 끌려간 보석점 앞에서 그로부터 더 이상 보석점에는 데려가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은 뒤 목걸이를 구입하기로 하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녹수정 목걸이 2개를 샀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는 우리가 나오자마자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기분 좋은 얼굴로 되돌아 온 그는 가게 주인으로부터 40원을 받았다고 하였다.(혹은 그 이상일지도...) 이날 그는 더 이상 상점에 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하루의 일일유를 계약한 그 다음 날도 상점에는 데려가지 않았다.
낙양.
한국의 티코 같이 생긴 택시를 탔다. 작은 차에다 앞 뒤 자리를 막아 놓은 쇠창살이 있어 더욱 답답했다. 호텔을 찾으려고 우연히 잡은 차였다. 기사는 큰 키에 치열이 고르지 못하고 머리카락이 듬성듬성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낙양에서 제일 큰 호텔인 모란대주점에 가자고 하였고(낙양은 소도시이다.) 그는 우리에게 이것저것 말을 시키면서 차를 몰았는데 도착하고 보니 낙양대주점이었다. 아마 모란대주점은 손님을 안내한 기사를 배려하지 않는가 보다.
남편이 항의를 하자 어색하게 말을 얼버무렸다. 화가 난 남편이 호텔처럼 보이는 이웃의 큰 건물로 가려하자 한사코 앞을 가로막았다. 그곳은 호텔이 아니라 회의센터라며. 이미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던 우리가 직접 가서 확인한 그곳은 멀쩡한 3성급 호텔이었다. 호텔 밖에는 우리를 따라온 그가 아직 가지 않고 서성거리고 있었다.
새로 확인한 호텔이 시설은 좋으나 가라오케 소리 등으로 시끄러워 아이들을 데리고 묵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듯 했으므로 우리는 나와서 다시 낙양대주점으로 갔다. 눈길 한 번 주지 않았건만 그는 앞장서서 우리를 안내하며 호텔로 함께 들어왔다. 우리가 투숙을 결정함으로써 어떤 혜택이 그에게 주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목적을 달성한 뒤에도 그는 가지 않았다. 더 중요한 두 번째 목적인 일일유가 남아 있었기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남편을 그는 간곡하게 회유하기 시작했다. 먹고살기 힘들어서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했으니 정말 죄송하다며, 그래서 내일 하루 저렴한 가격에 모시겠다고.
겉으로는 깐깐해도 마음 여린 남편이(본인은 인간적이라 주장한다.) 승낙하고 말았다. 국적과 직업은 달라도 이 험한 세상에서 식솔들을 벌어 먹여 살려야 하는 같은 가장으로서 그를 이해한 탓이리라. 그 다음날 그는 한 때 거짓말 한 것이 미안한지 내내 우리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의 일일유도 또 제의했으나 우리의 형편에 맞지 않아 거절했다.
♧ 인력거 기사 ♧
내몽고의 상하이, 빠오터우(包頭).
정말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장관이었다. 저녁을 먹고 가이드를 따라 빠오터우에서 제일 큰 광장으로 나갔다. 넓은 잔디밭에 대단히 큰 규모의 분수가 하나 있었는데 여름밤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교향곡에 맞추어서 높이와 색깔이 다른 물기둥이 다른 속도로 뿜어져 나오면서 마치 춤을 추듯 공연하고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수면 위에도 갖가지 색의 물줄기가 솟아올랐다. 잠시 후 그보다 더 멋진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수막 영화라 하여 물줄기를 스크린으로 삼아 영화를 상영하는 것이었다. 자막을 실은 군가 등이 웅장하게 울려 퍼졌고 이어 디즈니 만화영화까지 보여주었다. 삼삼오오 친구, 가족과 어울려 앉은 사람들은 대형 극장에라도 온 듯 시원한 영화를 감상하고 있었다.
아이들과 정신 없이 구경하다가 시계를 보니 벌써 11시경이었다. 숙소까지 걸어가기에는 너무 늦었다. 인접한 큰 도로로 나와보니 오토바이 인력거가 하나 보여서 올라탔다. 오토바이에 작은 지붕을 씌운 수레를 부착한 것이다. 다리를 펼 수 없을 만큼 공간은 좁았지만 그래도 4인용이었다. 요금은 3원이었다.(이곳의 택시비는 기본 요금이 5원.)
택시와는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관광지에 가면 이렇게 오토바이 수레 기사가 많이 대기하고 있다. 단거리일 경우에는 이를 이용하기도 한다. 모터로 운행하는 오토바이이므로 사실 인력거는 아니지만 손님을 호객하는 수단으로도 쓰이고 여자 운전자들도 꽤 있다.
예전에 쑤조우에서 자전거 인력거를 탄 적이 있다. 오나라 성곽 판먼에서 나오니 자전거 인력거꾼이 다가왔다. 지붕 달린 2인용 수레를 자전거에 매단 것인데 사람이 힘들여 페달을 밟아야 수레가 나가니 인력거인 셈이다. 우리 가족이 4명인 것을 알고 어디선가 동료를 데려왔다. 남편과 나는 몸무게를 고려하여 아이 하나씩을 데리고 수레에 올랐다.
마침 큰 아이와 내가 탄 자전거 인력거의 운전사는 비쩍 마른 몸매의 허약한 사람이었다. 안장에 엉덩이를 붙이지도 못하고 바로 우리 눈앞에서 몸을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가 힘들게 페달을 밟으니 어디 미안해서 편히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묵을 숙소를 찾아다니는 길인데 오르막길에서는 아예 자전거에서 내려서서 끌고 가기에 우리 모녀도 수레에서 내리려 했으나 그는 만류했다.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겨우 숙소를 정하였다.
요금은 일인당 1원이었다. 그 먼 길에 비지땀을 흘리며 넓적한 나무 페달(힘을 주기 위해 바꿨다)을 밟은 수고료가 1원이라니. 그렇게 적은 돈으로 어떻게 생활할 수 있을까? 남편은 그들에게 10원을 주었다. 거스름돈을 주머니에서 꺼내면서 처음에는 사양했다.
그들에게도 계산이 있었다. 손님을 데리고 왔으므로 호텔 측으로부터도 돈을 받은 데다 더 중요한 거래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다음날 자기들이 소개하는 일일유 차를 타면 또 소개비를 받는다는 것이다. 망설이다 결국 우리는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다음날 아침 그 차에 올랐다. 최초의 일일유였지만 여러 가지 좋지 않은 경험을 하였으므로 그 후로는 그런 전문 일일유 봉고차량은 이용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 가이드 ♧
추성의 맹자 사당.
맹자 사당 입구에서 우리 아이가 헝클어진 머리를 다시 묶는데 얌전하게 생긴 안경 낀 젊은 여자가 애 머리 끈을 잡아 주었다. 그녀는 웃으며 따오여우(가이드)가 필요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남편이 고개를 젓는데도 계속 우리를 따라왔다. 한참을 그냥 가다가 마음을 바꿔 손짓하니 반색하며 옆에 다가와 설명을 시작했다. 또박또박 천천히 정해진 설명문을 외우고 있었다. 간혹 남편이 그녀의 궤도를 벗어난 질문을 던지면 몹시 난처해했다. 사당을 한 바퀴 돌고 난 뒤 20원을 건네주고 헤어졌다.
그 이후로는 한번도 가이드를 쓰지 않았다. 관광지에서는 항상 단체관광을 인솔하는 가이드가 있으므로 남편은 중국어 가이드 주변에, 나는 영어 가이드 근처에 가서 얻어듣고 아이들에게 일러 주곤 했다. 북경 13릉에서는 한국인 단체관광객들을 많이 만났는데 조선족 가이드들을 볼 수 있었다. 남편 말이 가이드들이 설명하는 내용 중에 오류가 많다고 한다.
서안 섬서역사박물관.
상해의 박물관은 청동기 전시관이 훌륭하고 북경의 역사박물관은 테마전시실이 볼 만했다. 서안의 섬서역사박물관은 주(主) 전시실이 시대별로 잘 정리되어 있었다.
영어에 능통한 중국인 가이드들이 서양인들을 이끌고 들어왔다. 우리가 관람하는 동안 이곳에서 네 명의 영어가이드를 만났다. 체구가 작은 젊은 청년은 어깨를 들썩이며 열정적으로 설명하였으나 그의 주위에는 사람이 적었다. 나이가 지긋한 중년의 남자 가이드는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유도하면서 안정감 있게 설명하였는데 많은 사람이 귀를 기울였다. 연륜의 차이를 보는 듯 했다.
병마용박물관부터 역사박물관까지 딸 둘을 견학시키는 미국인 아버지가 있었다. 아이들에게 상세한 설명이 필요할 텐데 그의 가이드는 영어가 부족한 듯 자주 더듬거렸다. 흰 와이셔츠의 목 언저리가 얼룩질 만큼 땀을 많이 흘리고 있어 보기 딱했다.
네 번째 본 가이드는 수수한 옷에 긴 머리를 뒤로 묶고 얼굴이 영리하게 생긴 처녀였다. 침착하고 명쾌하게 설명하면서 외국인 부부를 안내하고 있었는데 발음도 정확하고 내용이 상세하여 특히 부인이 몹시 만족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 부부의 질문에도 막힘이 없었다. 가이드가 전문직임을 확인시켜주는 매력적인 아가씨였다.
북경 천단 공원.
천자가 하늘에 제사 드렸다는 천단 공원. 기년전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옆에서 가이드 특유의 또박또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비쩍 마른 몸매에 낡은 원피스를 입은 40대 여인이 관광객 없이 혼자 서 있었다. 가이드가 되기 위해 현장 연습 중인 듯 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지만 메마른 표정, 피곤한 얼굴을 보니 현재 그녀의 생활이 여유 있는 문물 관람과는 거리가 먼 고단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싸우듯이 입에 힘을 주고 소리 높여 외우고 있었다.
유적지에서 손가방을 들고 관광객에게 다가오는 여성들은 거의 다 가이드들이다. 가이드 자격증을 목에 걸고서 가이드 없이 온 개별 관광객에게 접근한다. 세련되게 차려 입은 젊은 아가씨에서부터 집에서 일하다가 나온 듯한 나이 많은 부인까지 연령층이 다양하다. 개방 이후 중국에 관광객이 몰려들면서 생겨난 새로운 직업이다 보니 아직 아마추어적 소양으로 안내하는 가이드들이 많아 보였다. 어떤 곳에서는 가끔씩 찾는 관광객들을 기다리며 대기실에서 떼지어 기다리는 가이드들을 보기도 했다. 그들간에도 경쟁이 치열한 듯 했다.
♧ 상인 ♧
낙양 백마사.
차에서 내리자마자 향 파는 아주머니 여럿이 우리를 에워싼다. 한꺼번에 대 여섯 명이나 오면 어쩌란 말인가? 사더라도 한 뭉치면 충분한데. ‘뿌야오!’ 하며 그들을 피해 가는데 자꾸 뒤따라온다. 할 수 없이 인상을 쓰면서 조금 큰 목소리로 ‘뿌야오!’ 외쳤다. 또 다른 택시가 맞은 편 도로에 서자 그쪽으로 한꺼번에 뛰어간다. 반대편에서 차가 오고 있는데 몹시 위험했으나 그들은 주저하지 않았다. 뛰어가는 사람 수를 헤아려보니 여덟 명이었다.
문표를 사려다 멈칫했다. 말끔하게 단장하고 세련되게 꾸며놓은 것이 마치 현대식 공원 같았다. 그 절 승려 몇 명이 입구에서 문표 받는 직원 일을 하고 있었다. 중국 최초의 사찰인 백마사는 고색 창연한 빛을 잃고 완전히 신식 건물이 되어있었다. 시간도 없고 들어갈 마음도 나지 않았다. 절의 앞, 옆에서 기념 사진만 찍고 돌아서는 우리가족에게 백마 목걸이를 파는 아주머니가 또 따라붙었다. 하도 사정하기에 1원짜리 목걸이 하나를 사서 아이 목에 걸어주었다. 아이가 둘인데 왜 하나만 사느냐고 그 아주머니는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서안 법문사.
택시가 법문사 들어가는 입구로 향했다. 중국의 평범한 농촌 풍경에서 어느새 전형적인 관광지 모습으로 바뀌고 있었다. 즐비한 식당 가를 들어서는데 젊은 남자들이 나와서 서로 자기 쪽으로 핸들을 꺾으라고 손짓을 하는 것이었다. 그중 한 남자는 위험하게도 달리는 차체에 손을 대고서 자기 식당으로 가자고 하였다. 우리는 잠자코 있었고 우리 택시 기사가 ‘츠구어러(밥먹었다)’라 소리쳤다. 그는 하는 수 없다는 듯 뒤로 물러섰다. 목숨을 건 호객행위였다.
서안 건릉.
이 아이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 동네에 사는 아이들일까? 아니면 부모 없이 떠도는 아이들일까? 많아야 열 너댓 살, 그 중에는 유치원 다닐 만한 대 여섯 살 난 아이들도 있었다. 당 고종과 측천무후의 무덤인 건릉 주변에는 그런 아이들이 많았다. 새까만 얼굴에 먼지 묻은 낡은 옷을 입고 등에 가방을 메거나 손에 보따리를 들었다. 그들이 5원이라고 하며 때묻은 손으로 꺼내는 것은 동물 마스크였다.
겨우 한 아이를 벗어나면 산 중턱에서 또 다른 아이들을 만나고. 어떤 아이는 아이답지 않게 눈매가 살벌하고 영악해 보였다. 그러나 산 위에서 만난 12살 되는 여자아이는 마치 표정이 생활에 지친 중년아줌마의 피곤한 얼굴이었다. 가슴이 뭉클하여 그 동물마스크를 하나 사주려고 아이를 찾으니 어디로 갔는지 간 곳이 없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 역술가 ♧
서안 법문사 앞 식당.
식당에는 식사하는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다. 안쪽 구석에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함께 식사하던 우리 택시기사가 저 사람이 뭘 하는 사람인지 아느냐고 묻더니 관상보고 점치는 사람이라고 알려 주었다.
그 노인은 깡마른 몸매에 눈빛이 형형했다. 중국의 전통 복장인 치파오를 입었는데 가슴에 커다란 핀으로 뱃지 하나를 달고 있었다. 사람의 사진이 든 그 뱃지는 여백이 붉은 색이어서 마치 북한의 김일성 뱃지처럼 보였다. 기사의 설명에 따르면 그의 스승의 초상화란다. 옷은 낡았지만 깨끗했고 다리 한쪽이 떨어져 나간 돋보기 안경에 굵은 실을 매달아 귀에 걸고 있었다.
남편은 노인 쪽으로 고개를 돌려 매화역수를 아느냐고 물었다.(매화역수는 송나라 때 소강절이라는 사람이 발명한 주역의 응용점법으로 사람이나 사물의 움직임이나 동작의 방향을 보고 치는 점이라고 한다.) 그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남편의 앉은 방향을 보고서 주역의 한 괘를 이야기하며 가까이 다가왔다.
남편과 몇 마디를 주고받은 노인이 종이를 꺼내들고 생년월일시를 물으며 본격적으로 시작할 기세를 보였다. 얼른 일어난 남편이 그에게 담배값이라며 10원을 건네고는 우리를 돌아보며 그만 나가자고 하였다. 노인은 점을 봐주지도 않고 받은 뜻밖의 돈에 반색하였다.
법문사 탑 앞에서 사진을 찍고 돌아 나오는데 머리가 덥수룩하고 수염을 기른 젊은 남자가 길 가던 한 사람을 붙들고 ‘네 관상이 대단히 좋다. 높은 자리에 오르겠고...’ 한다. 그의 가슴에도 빨간 뱃지가 달려있었다.
관광지 주변에 역술가들이 자주 눈에 띤다. 지난번 양주에 갔을 때에도 버스정류장에서 젊은 사람이 남편에게 ‘당신 관상을 보니 높은 자리에 오르겠다’ 며 점을 볼 것을 권하였다. 관상이 좋다, 높은 자리에 오른다란 말은 이 사람들이 상투적으로 쓰는 말인 것 같았다. 10원만 복채를 내면 소상히 천기를 알려주겠다며 계속 따라오는 통에 난처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가슴에는 빨간 뱃지가 없었다.
♧ 걸인 ♧
태산역.
광장으로 택시가 들어오자 허름한 행색의 노파 두 명이 열리는 택시 문 앞으로 손을 내밀며 다가섰다. 승객이 택시 요금을 내고 거스름돈을 받을 때 그 잔돈을 얻어보려는 걸인이었다.
낙양 관림.
조조가 손권이 보내 온 관우의 목을 묻었다는 곳이다. 팔 없고 다리 없는 장애자들이 그 앞 빈터에서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구걸을 하고 있었다. 몹시 보기 딱했다.
북경역.
넓은 북경역 광장. 장애자들이 이곳 저곳에 누워있는 모습이 눈에 띠었다. 지나가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을 보니 몸이 퉁퉁 붓고 사지가 뒤틀린 장애자 한 사람이 누워있고 그보다 좀 덜한 사람은 앉아 있었다. 경찰이 그들을 상대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누워있는 사람이 위독한 듯 했다.
서안.
택시가 서안 근교 국도를 달리는데 갑자기 젊은 남자가 차로 뛰어들었다. 머리를 빡빡 깍은 사람이었는데 택시 기사에게 1원 짜리 지폐를 보이며 중앙선을 넘어섰다고 1원을 내란다. 기가 막힌 기사는 비키라고 호통을 치다가 잠시 주저하더니 1원을 건네주었다. 그는 그제야 길을 비켜주었다.
기사는 다시 차를 몰면서 우리에게 몇 번이나 강조하였다. 이 도로는 실선이 아니라 점선이므로 절대로 규칙을 위반한 것이 아니고 또 저 사람은 경찰도 아니라고. 살펴보니 정말 도로 한 중간에 그어진 선은 점선이었으므로 우리는 당신 말이 옳다하고 그 억울한 기사를 위로했지만 별별 사람이 다 있다고 그는 계속 분통을 터트렸다. 무척 놀랐을 것이다. 돈 1원 얻고자 달리는 차로 뛰어들다니 그 남자의 협박성 구걸은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관광지는 문물의 보고인 동시에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다. 관광지 주변에서 고단하게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는 박제된 문물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생생한 민초들의 삶을 느낄 수 있었다.
과거를 살던 수많은 凡人들은 다 흔적 없이 사라지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호걸만이 그들의 자취를 남겼으니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관람하는 문물이요 유적이다. 그러나 사당에 모셔진 과거 위인들의 삶이나 저 문 밖에서 물건 하나 팔아보려고 악다구니를 쓰는 현세 범인들의 삶이나 인생의 본질은 똑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 없는 민초의 삶은 이름난 영웅의 삶보다 가치가 없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까?
관광지 주변에서 만난 사람들. 자신에게 주어진 몫대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들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관광객에게 턱없이 폭리를 취하려는 사람도 있었고,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하여 정직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지만 생활의 무게를 힘겹게 버티며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역 앞에서 지도를 팔던 할머니들, 신문을 끼고 팔던 아저씨들, 가방 하나에 소품들을 넣어 다니며 파는 아주머니들, 북경의 길거리에서 막걸리 같은 술을 팔던 노인, 승덕역 버스에 올라 물을 팔던 눈썹 흰 점잖은 할아버지도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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