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상해편지

[상해편지2] 중국에서 본 월드컵

kmlee1 2024. 12. 1. 11:10

 

 

25일 오후 7시 샤오싱(紹興). 루쉰(魯迅)선생의 작품에 등장한 뒤 이 지방의 명물이 된 함형주점(咸亨酒店)에 묵으며 30분 후에 있을 한국 대 독일전을 시청하기로 했다. 저녁을 먹고 오면 시합을 놓칠 것 같아 컵 라면을 사러 슈퍼마켓에 갔다. 마침 카운터의 종업원 두 명이 물건을 봉지에 넣으며 자기들끼리 한국 축구 이야기를 한다. 

 

'한국이 독일의 상대가 될까?' '어림없는 소리. 어떻게 한국이 독일을 이길 수 있어?'. 호텔 로비 안내판에 월드컵 경기를 대형화면으로 시청할 수 있다고 적혀 있기에 올라가 보았더니 그 넓은 홀에 달랑 한 사람만 앉아 있다. 그나마 무료가 아니라 식사를 해야 시청할 수 있단다. 

 

23일 아침 상하이 푸단대 외국인 전용 숙소. 현관을 지나는데 막 출근하던 복무원과 마주쳤다. 그쪽에서 먼저 말을 건네 왔다. '야. 심판이 한국 너무 봐주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한국 선수들 하기는 잘 하대요.' 차 잎이 가득 든 물병을 빙빙 돌리며 애매한 웃음을 짓는다. 사무실 안에 있던 다른 직원도 '심판이 완전히 한국편이에요.' 하며 동료의 의견에 동의한다. 좀 눈치가 보이는지 '한국 골 키퍼 정말 대단해요.' 한마디 덧붙인다. 

 

22일 수쩌우(소주蘇州) 기차역 대합실. 한국과 스페인전이 열리는 시각이다. 텔레비전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가 중계방송 소리를 듣고 2층 찻집에 들어갔다. 두 대의 텔레비전 앞에 20명 남짓한 사람들이 앉아 있다. 

 

그만한 청중들이 한국과 스페인의 현란한 플레이에 별 미동이 없다. 골문에서 아쉽게 비켜 가는 한국 진영의 애석한 공에 우리가족이 비명을 지를 때도 한번 흘깃 돌아다보기만 할 뿐 무심하다. 두어 사람은 서로 눈짓하며 '한국인인가 보다' 속삭인다. 바로 옆 테이블의 아줌마는 우리 아이들의 정체를 알고 미소를 보낸다. 

 

연장전 직전 우리 가족은 예정된 시간 때문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기차에 올라야 했고 상하이로 오는 내내 그 결과가 궁금했지만 알 길이 없었다. 상하이 지하철 앞에서 집으로 가는 택시를 타자마자 기사에게 축구에 대해 물었다. 그는 중계방송을 들었다며 한국이 스페인을 승부차기로 이겼다고 담담하게 말하였다. 택시가 출렁거리도록 환호성을 지르는 우리들을 보고 그는 말 한 마디 없었다. 점잖은 기사였다. 

 

18일 밤 이탈리아전이 끝난 직후, 알고 지내던 중국인 노교수가 축하 전화를 걸어왔다. 한국 축구의 수준이 대단히 높은데 감탄했으며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기쁘다고 흥분한 목소리로 전해왔다. 

 

그분은 한국의 대학에서 1년 간 교환교수로 지낸 적이 있어 한국에 대해 각별한 애정이 있는 분이다. 푸단대를 정년퇴임하고 부속기관인 국제교류학원에서 강의를 하는데 가끔 공부 안하고 방황하는 철없는 한국유학생들을 보면 야간에 불이 환히 켜져 있는 도서관 앞에 그들을 데리고 가서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이 시간에 너희들은 이 외국 땅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며 일깨워주기도 한다. 그 분은 한국이 잘 하는 것이 정말 기쁜 것이다. 

 

24일 항쪄우(杭州)에서 시후(西湖)로 가는 택시 안. 우리가 한국인인 것을 아는 순간 택시 기사는 축구 이야기를 꺼낸다. '한국 축구 정말 잘 해요. 중국은 큰 나라인데도 16강에도 못 끼었지만 한국은 작은 나라이면서도 4강에 들어갔네요.' 

 

한껏 기분이 좋아진 우리 가족은 그를 위로했다. 한국은 5천만이 채 안되지만 중국 인구는 13억이 넘으니 그 중에는 축구천재가 얼마든지 있을 것이고 곧 중국도 잘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자 의외로 그는 고개를 내젓는다. '힘들겁니다. 내부에 워낙 문제가 많아서 좋은 선수를 선발하기도 어렵고 잘 키우기도 힘들어요.' 초반에 약하게 무너진 중국 팀에 대한 중국인의 자기 반성이었다. 

 

 

우리 모두는 한국 축구 역사가 다시 쓰여진 2002 월드컵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4강에 들었으니 앞으로 더 큰 영광도 차지할 수 있음이 분명하다. 긍지와 자부심이 넘칠 한반도! 마침 외국에 있어 함께 하지는 못하지만 한국전이 있는 날이면 그라운드의 붉은 열기를 텔레비전으로 느끼면서 위대한 대한민국임을 가슴 깊이 새겼고 시합이 끝나면 인근에 사는 한국인들과 뭉쳐 축하 뒤풀이를 했었다. 

 

한편, 열광의 중심에서 비껴나 있으니 오히려 제 3자의 눈으로 상황을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한국경기가 끝나면 곧 바로 인터넷에 들어가 경기를 분석, 전망한 기사를 찾아보았는데 그 중 중국의 태도를 비난하는 한국 네티즌들의 글이 눈에 띄어 그때부터 주위의 중국인들을 관찰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선전에 대한 중국인들의 심리는 질투와 선망, 인정, 반성, 무관심 등으로 다양한 것 같다. 문제가 되는 것은 개인이 가질만한 감정을 언론에서 여과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한국전 심판의 불공정함, 홈그라운드의 이점이 지나치다는 점을 강조한 기사가 신문에 등장하는가 하면 CCTV 5의 중계방송 도중 아나운서가 감정에 치우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한국의 상대국에서 찬 공이 한국 골문을 비켜갈 경우 '아요~' 하는 중국인 특유의 감탄사를 내며 아깝다고 몹시 탄식하거나 개인적으로 응원하는 팀이 한국에 졌다고 섭섭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독일전 중계에서도 여자아나운서는 해설자에게 '한국이 전반전에서 열심히 뛰었는데 후반전에도 지치지 않고 뛸 수 있을까요?' 라는 속마음을 짐작케 하는 질문을 은근히 하였다. 언론은 개인의 의견을 피력하는 네티즌과는 또 다른 영향력 있는 대중매체이므로 늘 공정해야하는데 그렇지 않아 아쉬운 것이다. 

 

언론이 이러하니 일반 중국인들도 한국축구에 대한 질투와 선망을 드러내는 경우가 흔하다. 기분 좋게 썩 칭찬을 하지 않고 '잘하기는 하는데 ...' 하면서 편파적인 심판 이야기로 토를 단다. 중국 네티즌 중에도 과격한 사람들이 많아 자극적이고 감정적인 글들을 인터넷에 올리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자성의 소리를 내는 지식인들도 많이 있다. 발전적인 한국 축구에서 배울 점이 많으며 무능한 중국 축구에 대해 반성해야한다는 칼럼이 나온다. 같은 외국인 감독인데 왜 전혀 다른 결과를 가지고 오는가? 중국은 선수선발부터 육성에 이르기까지 부정 부패 등 구조적 문제가 있다고 솔직히 고백하며 이를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한다고 일깨우고 있다. 

 

한 칼럼니스트는 한국전에서 수많은 관중들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심판에게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하더라도 그것이 들어오는 공을 척척 막아내는 이운재의 '보이는 손'을 이길 수는 없었다고 적었다. 

 

또한 일반인 중에도 객관적인 평가기준을 가진 사람이나 한국에 知人이 있는 사람들은 변모한 한국 축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승리를 축하해준다. 물론 한국의 승전에 전혀 무관심한 축도 있다. 이렇듯 반응이 다양하다. 

 

한국은 결승전에는 진출하지 못하였으나 분명 실력 있는 나라로 인정을 받았고 주최국으로서의 당당한 면모를 세계에 과시하였다. 승자의 아량과 여유를 가져야 할 때인데 한국인 특유의 흥분과 결속이 때로 지나칠 때가 있는 듯하다. 

 

패배한 이탈리아 선수들에게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외치는 것이나 부정적인 외국 언론에 대해 격렬하게 반발하는 것 하는 등이 그것이다. 우리한국이 이겨 한없이 기쁜 것과는 별도로 땀 투성이가 된 건장한 남자가 그라운드에 앉아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나 목발을 짚으며 고개를 떨구고 힘없이 나가는 감독의 뒷모습을 보면 승리의 기쁨 뒤에 패배의 아픔이 있음을 느낄 수도 있어야 한다. 히딩크 역시 선전한 상대팀 선수를 경기 후 껴안고 격려해 주지 않았는가?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중국의 석연찮은 평가에 대해 그다지 흥분할 일이 없을 것이다. 자기 반사적인 이익을 구하는 것은 인지상정이고 우리 역시 그러할 지도 모른다. 만일 우리 축구가 초반에 패배하고 일본(日本)이 승승장구한다면 우리가 마냥 기쁜 마음으로 순수하게 일본을 찬양할 수가 있겠는가? 

 

이렇게 이해하고 그대로 내버려두자. 대국답지 않게 속 좁은 질투를 하는 점이 있다면 이는 중국의 몫으로 고스란히 남는다. 그들의 문제이다. 뒤쳐진 축구 실력 못지 않게 공정하지 못한 언론은 힘써 해결해야할 중대한 사안인 것이다. 

 

막바지에는 한국의 여론을 의식하였는지 비교적 우호적인 멘트를 하였다. 25일 CCTV는 독일전의 중계를 하며 한국 골키퍼 이운재를 두고 '신(神)수(手)문(門)신(神)'이라 표현했었다. 신의 손을 가진 문을 지키는 신이란 뜻이다. 또한 은근히 스페인을 응원했었던 여자 아나운서가 독일전이 끝난 후에 한국 관중들이 패하였으나 흥분하지 않고 질서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며 성숙한 응원 문화를 칭찬하자 승리할 만큼 했으니 그렇지 않겠느냐고 남자 아나운서가 웃으며 말을 받았다. 

 

칭찬이든 비난이든 각자의 기준으로 보게 되는 것이 세상 이치인 듯 하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승리이다. 괄목할 만한 축구 실력을 보여준 태극 전사나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질서 있는 길거리 응원전, 최선을 다해 응원하고 결과에 승복하여 이긴 독일 팀에게 웃으며 축하해주는 붉은 악마들. 이것이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승리이다. 

 

세계를 하나로 묶은 이 엄청난 스포츠 뒤에 숨은 진정한 정신을 이렇게 놓치지 않고 히딩크 감독과 장한 우리 선수들이 이끈 이 쾌거의 요인을 제대로 분석하여 계속 강화한다면 4년 뒤에도 틀림없이 우리에게 영광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