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상해편지

[상해편지1] 중국의 미래, 상하이

kmlee1 2024. 12. 1. 11:09

 

 

 

이탈리아와의 연장전 후반, 마침내 안정환의 골든 골이 터지자 우리 가족은 환호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서고야 말았다. 곧이어 텔레비전 화면 가득 펼쳐지는 태극기를 보며 겨우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는데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 소리. 친분이 있는 중국인의 전화였다. 

 

“축하합니다. 한국선수들 어쩌면 그렇게 잘 하는지 감탄했어요. 실력뿐 아니라 투지와 정신력이 대단해요. 한국이 아시아를 대표하게되어 같은 아시아인인 중국인으로서 무척 기쁩니다.” 

 

평소 점잖던 그의 음성은 오늘 따라 카랑카랑했다. 아, 그렇다. 한국과 중국은 아시아라는 하나의 단위에 묶여있고 이런 단위들이 모여 세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월드컵에 열광하는 것도 온 세계가 하나라는 통합성, 단일성을 체감할 수 있기 때문 아닌가 ?

   

여기는 중국의 상하이다. 일 년 체류 예정으로 이곳에 온지 이제 4개월이 되어간다. 

장차 미국의 유일한 대안이 중국이라고 했던가?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 중의 하나로서 오랜 역사를 지닌 중국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다. 워낙 방대한 땅덩어리, 엄청난 인구, 엄격한 사회주의 체제의 나라여서 전 세계가 인지할 만한 변화를 이루는데는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 분명하지만 그 미래의 변모된 모습을 미리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상하이다. 

 

상주인구 1300만, 유동인구 300만. 세계 3위 도시, 중국최대의 무역항이자 최대 수출기지로서 수도인 베이징의 위상을 능가하는 상하이. 황푸강을 중간에 두고, 20세기 초 상하이에 진출한 서구열강들이 각 국의 건축양식을 동원해 지은 웅장한 고 건축물들이 서있는 와이탄(外灘)과 하늘을 찌를 듯한 현대식 고층건물들이 즐비한 푸둥(浦東)은 상하이의 어제와 오늘이자 중국의 과거와 미래를 상징한다. 자료를 참고하여 알아보자.

 

 <상하이의 어제>

  양쯔(揚子)강 하구에 자리잡은 상하이(上海)는 원래 자그마한 어촌에 불과했다. 이렇게 잠자고 있던 상하이 앞 바다에 1842년 영국함대가 침범하여 해안요새를 무참하게 포격하면서 중국정부를 굴복시켰다. (우리 아이들이 중국의 소학에 입학하여 처음 배운 교과서의 내용이 우송커우(吳凇口)에서 영국함대와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천화청(陳化成)이라는 노장군의 전기였다. 중국인들은 아직도 그 아픔을 기억하는 것이다.)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중국정부는 치욕의 난징(南京)조약을 맺고 이 도시를 조약항이라는 명목 하에 외국인에게 개방했다. 이로써 상하이는 외국인 상인들이 다스리는 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했으며 1900년대 초반부터 2차대전이 발발한 1940년대 초까지 영국의 런던, 미국의 뉴욕에 버금가는 세계 3대도시로 대접받았다. 

 

런던이나 뉴욕과 다른 면이 있다면 당시의 상하이는 한마디로 완벽한 자유와 무법천지가 공존하는 특이한 도시였다는 점이다. 여러 자본가나 군벌, 갱들이 뒤엉킨 채 적자생존의 정글을 연출했으며 생존경쟁에서 튕겨져 나간 중국인 서민들은 정확히 ‘두 손으로 움켜쥘 정도의 쌀'을 얻기 위해 하루 온종일 노동을 해야 했다. 이들 서민의 평균수명은 겨우 27세로 13세기 유럽 사회와 비교되곤 했다. 

 

당시 이 곳에서 포교활동을 벌였던 한 종교인은 "하느님이 상하이를 용서한다면 그분은 소돔과 고모라에 용서를 빌어야 할 것"이라고 한탄했을 정도였다. 이 무렵 이곳을 여행했던 김소엽(1912~?/월북시인)은 동서양이 만나 탄생시킨 이 도시의 번성을 두고 자본주의가 낳은 『동․서양의 혼혈아, 아! 불행한 혼혈아야, 너는 장차 어데로 가려노?』라고 하였다. 단정한 유교적 도덕관을 가진 조선의 선비가 보기에 상하이의 번화한 모습은 도덕적 타락으로 비추어져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 상하이의 꽃은 부두에 면한 약 12㎞에 이르는 와이탄(外灘)지역이었다. 이곳에는 홍콩상하이은행을 비롯, 노스 차이나 데일리 뉴스, 상하이 클럽, 차터은행, 삿슨 하우스, 중국은행, 요코하마쇼킨은행, 자딘매디슨 상회의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들이 줄지어 서있다. 

 

반면, 줄지어선 건물 뒤편의 도심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이 연출되고 있었는데 경찰이 평균 5시간마다 한번씩 총을 발포할 정도로 1500곳 이상의 아편굴, 80곳 이상의 아편판매소, 백계 러시아 내지 중국인 여자들이 모여 있는 매춘굴, 도박장 등이 중국 갱들의 기생처로, 그리고 악덕 자본주들의 돈벌이 수단으로 번창하고 있었다. 

 

그 당시의 상하이를 또 다른 각도에서 표현하자면 요즘 흔히 말하는 국제도시였다는 점이다. 상하이는 크게 프랑스조계, 영국․미국․일본이 관할권을 갖고 있는 공동조계, 그리고 중국인 통치지역으로 3분돼 있었으며, 프랑스조계에는 프랑스인은 말할 것도 없고 백계러시아인들이 ‘리틀 러시아'거리를 형성, 상하이판 러시아문화를 활짝 꽃피웠다. 

 

공동조계의 홍구공원(윤봉길의사가 도시락 폭탄을 던졌던 곳)을 중심으로는 3만 명의 일본인들이 몰려 있어 ‘리들 도쿄󰡑로 불렸으며 그 바로 옆에는 1938년부터 1941년까지 독일 나치스 정권의 박해를 피해 몰려든 독일계 유대인 1만8000명과 폴란드계 유대인 4000명이 ‘리틀 빈'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상하이의 유명한 자본가 계급 가운데는 거드리, 삿슨, 할둔, 에즈라 일족의 4대 유대계 재벌이 있었는데 모두 아편 장사로 돈을 벌어 나중에 차(茶), 비단 및 부동산 사업을 일으켜 대표적인 상하이 귀족 가문을 이뤘다. 이러한 번영은 중국 인민해방군이 1948년 이 도시를 점령했을 때까지 이어졌다.

 

 

<상하이의 오늘>

 1949년 이후 공산 체제하에서 침체 일로를 걷던 상하이는 등샤오평의 중국개방정책으로 다시 빛을 보게 된다. 1990년 12월 상하이 증권시장개장과 1992년 푸둥(浦東)지역을 개방특구로 선포한 두 가지 사건을 계기로 금융과 상업의 중심적 지위를 재탈환한 것이다. 

 

황푸강 동쪽의 푸동신구. 중국의 개방정책의 가시적인 성과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지역이다. 그 옛날 중국관리들이 몰수한 아편을 태워버리기 위해 배를 타고 건넜던 버려진 땅이었던 푸둥 지역은 현재 정보통신과 생명공학 기업들이 밀집한 첨단 도시로 변신하고 있다. 

 

동방명주탑(Oriental Pearl Tower)과 1998년 신축한 세계 3위 진마오 타워빌딩(88층, 중화제일빌딩, 아시아 최고층. 421m 높이)을 비롯한 하늘을 찌를 듯한 고층 건물 군은 이곳이 과연 중국인가 의심스럽게 한다. 영국건축가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gers)경이 설계했던 푸둥지구의 도시계획 마스터플랜으로 상하이는 지금 그 옛날의 번성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버전의 국제도시 그리고 세계화의 첨병으로 재탄생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 500대 기업 중 절반 이상이 진출해 있으며 세계적인 금융기관만도 그 숫자가 200여 개에 달한다. 외국인에게 토지를 70년 간 무상 대여하는 조건으로 건설을 허가해주어 현재도 계속 건설 붐을 일으키고 있으며 같은 유형의 건물은 허가를 내주지 않는 엄격하고 계획적인 도시건축으로 인하여 전세계가 견학 오는 건축박람회장으로서 매우 조화롭고 아름다운 신도시를 이루어 가는 중이다. 또한 1997년 7월 1일의 홍콩 귀속으로 인해 상하이는 떠오르는 태양으로 홍콩은 빛 바랜 도시로 그 위상을 위협받고 있다. 

<* 이상 상하이 한인 홈페이지에 실린 문화일보 이신우 논설위원의 자료 참고 *>

 

 

 처음 와이탄의 고건축물 위에 즐비하게 붙어있는 세계 각 국 일류 회사의 이름사이에서 SAMSUNG, SK를 보았을 때의 반가움, 번화한 쇼핑거리 난징루의 도로 양변에 쭉 걸려있는 LG 에어컨의 로고를 발견했을 때의 자랑스러움을 잊을 수 없다. 

 

하기 쉬운 말로 중국 13억 인구에 한국 상품 하나씩만 팔아도 13억 개라 한다. 그러나 중국 시장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오히려 1원씩만 손해를 봐도 13억 원이라는 계산이 더 안전할 것이다. 한국은 중국과 비슷한 문화를 가지고 또 양국어가 가능한 200만 명의 조선족을 활용할 수 있다는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중국에 진출한 타국 기업에 비해 이윤을 남기지 못하는 실정이다. 철저한 준비가 없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한국이 중국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온 역사적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중국문화는 한국에 건너와 한국고유의 문화로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 과거는 그러하였고 장차 양국관계는 어떻게 될까? 

 

중국 공안이 베이징 주재 한국 영사관에 침입하여 탈북자를 강제로 끌어내고 영사를 폭행한 불미스러운 사건이 한중수교 10주년의 축제분위기를 흐리게 하고 있다. 변화하는 아시아의 강대국 중국, 그러나 우리에겐 알 수 없는 중국이다. 

 

중국 땅, 중국인과 중국문화를 알아보는 것은 결국 우리의 미래를 준비하는 길이 될 것이다. 월드컵에 대한 관심이 한국과 중국을 엮어주고 있듯 장차 양국을 이어주는 것이 무엇이 될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