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상해편지

[상해편지3] 상하이에 남아 있는 한국의 자취

kmlee1 2024. 12. 1. 11:11

 

 

 ‘다른 위인들은 거의 다 가권이 있었으나 나는 아이들 둘도 다 본국 어머님께 돌려보낸 뒤라 홀몸이었다. 그래서 나는 임시정부정청에서 자고, 밥은 돈벌이 직업을 가진 동포의 집으로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면서 얻어먹었다. 동포의 직업이라 하여 전차 회사의 차표 검표원인 인스펙터가 제일 많은 직업이어서 70명 가량 되었다. 나는 이들의 집으로 다니며 아침  저녁을 빌어먹는 것이니 거지 중에는 상거지였다. 다들 내 처지를 잘 앎으로 누구나 내게 미운 밥은 아니 주었다고 믿는다. 

 특히 조봉길, 이춘태, 나우, 진희창, 김의한 같은 이들이 절친한 동지들이니 더 말할 것 없고, 다른 동포들도 내게 진정으로 동정하였다.

 엄항섭군은 프랑스 공무국에서 받는 월급으로 석오나 나 같은 궁한 운동자를 먹여 살렸다. 그의 전실 임씨는 내가 그 집에 갔다가 나올 때면 대문 밖에 따라나와서 은전 한두 푼을 내 손에 쥐어주며,

 “애기 사탕이나 사주세요.”

하였다. 아기라 함은 내 둘째아들 신을 가리킨 것이다. 그는 초산에 딸 하나를 낳고 가엾이 세상을 떠나서 노가만 공동묘지에 묻혔다. 나는 그 무덤을 볼 때마다 만일 엄군에게 그러할 힘이 아니 생기면 나라도 묘비 하나는 해 세우리라 하였으나 숨어서 상해를 떠나는 몸이라 그것을 못한 것이 유감이다. 오늘날도 노가만 공동묘지 임씨의 무덤이 눈에 암암하다. 그는 그 남편이 존경하는 늙은이라 하여 내게 그렇게 끔찍하게 해주었다. ’

 

위 글에서 ‘나’는 누구인가? 바로 백범 김구선생이시다. 소위 한 나라 정부의 대표라는 국무위원 주석이 잠은 사무실에서 자고 식사는 이 집 저 집에서 얻어먹어야 했던 그 지난한 시절. 고국을 등지고 바다 건너온 이국 땅에서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면서도 사람의 도리를 찾아 행했던 우리 동포들. 이 때의 모습을 선생은 ‘백범일지’에서 위와 같이 생생하게 기록하신 것이다. 

 

지난 2월 말 상하이에 온 이래 습하고 추운 날씨가 3, 4월까지 계속되었었다. 새벽 무렵 참을 수 없는 한기에 잠을 깰 때면 그 옛날 이 곳에 온 애국지사들이 말씀하셨다는 ‘저고리 끝을 파고들어 뼛골에 스미는 추위’란 표현이 실감났었다. 비가 자주 오는 흐린 하늘의 상하이. 

 

누군가 상하이는 우리에게 육친의 도시, 망명자의 어머니 같은 곳이라 하였다. 숱한 대한의 열혈남아들이 바다 건너 이 곳에 와서 그들의 이상과 청춘을 묻었던 곳이었으니... 상하이에는 우리 선조의 자취가 깃들어 있는 곳이 있다. 상해임시정부청사와 흥커우공원(루신공원)이다. 한국에서 온 관광객들은 거의 빠짐없이 이 두 곳을 다녀간다.  

 

 1. 상해임시정부청사

 

시 정부와 박물관이 있는 인민 광장에서부터 지도를 보기도 하고 행인들에게 묻기도 하면서 마땅루에 있는 임시정부청사를 찾아갔다. 도심지를 좀 벗어난 골목에는 오밀조밀한 서민 주택들이 늘어서 있다. 이런 저런 가게와 살림집들을 따라 쭉 걸어가다가 눈여겨보고 있지 않았다면 자칫 지나칠 뻔한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구지관리처’ 라는 흰 세로 간판이 관리실 유리문 옆에 걸려 있고 바로 그 앞에 서 있는 네모난 입간판에 중국어와 한국어로 ‘대한민국임시정부유적지’란 글씨와 화살표가 있다. 

 

이 관리실에서 ㄱ자로 꺽어 골목이 하나 있는데 모퉁이를 돌아보니 중국인들의 살림집이 촘촘히 들어서 있었다. 좁은 창문 밖으로 튀어나온 대나무 위에 널린 빨래가지며 문 앞에 서있는 자전거들, 오가는 주민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 우리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는 바로 중국인들의 살림집 건물 한 칸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구 선생이  53세 때 ‘백범일지’를 집필하기 시작하셨던 상해 법조계 마랑로 보경리 4호 임시정부 청사가 이곳이란 말인가? 

 

이 일대를 완전히 정비하고 ‘한국인의 거리’로 말끔하게 단장하여 우리나라의 위격에 맞추었으면 하는 마음과 한편 현재 보여지는 주변의 남루한 생활 전경 때문에 그 시대의 대한민국임시정부 분위기를 떠올릴 수 있지 않나 하는 두 가지 상반되는 생각을 하면서 출입구를 찾았다. 

 

15원씩의 관람료를 받고 있었다. 이 수입원은 모두 마땅루의 관리구청에 들어간다. 한국인의 돈이 중국인들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것이다. 좁은 입구에서 안내원은 신발에 덧씌울 비닐을 권한다. 옛날 마루여서 보호하자는 뜻인가 보다. 

 

두 사람이 교행하기 어려운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니 작은 방들이 나오는데 회의실, 집무실, 김구선생의 숙소, 요인 숙소 등이다. 전화기, 책상, 침대, 찻잔 등 집기는 옛 것의 흔적이 보이나 지금의 것들도 있다. 침대보는 요즈음 시장에서 파는 천이다. 어려운 시절을 거쳐오는 동안 옛 자취를 그대로 복원하기가 어려웠나 보다. 

 

현재의 건물도 이곳을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삼성그룹이 중국인으로부터 구입하여 이렇게 기념관으로 꾸민 것이라 한다. 그러나 실재로 이 건물이 정부청사로 쓰여졌던 것인지 불확실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조선족 아가씨가 독특한 발음으로 ‘여기는 주방입니다’ 하고 가리키는 곳의 커다란 항아리, 소박한 나무 식탁 등이 ‘백범일지’에서 읽은 분위기와 과히 다르지 않기에 그 물건들의 진위는 가리지 않기로 했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정부 사무실 벽에 안창호 선생이 쓰셨다는 ‘愛己愛他’와 이동녕 선생의 ‘光明’ 두 액자가 걸려 있었다. 자신과 타인을 사랑하여 잃어버린 조국의 광명을 찾자는 뜻을 새기는 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옛 마루를 지나 비닐 덧신을 벗고 새 마루를 밟으며 벽에 가득 붙인 사진과 참고 자료를 읽었다. 상해시기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4월에서 1932년 5월까지이다. 3. 1 운동 이후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각지에서 수립한 임시정부(대한국민의회-1919. 3 블라디보스톡, 대한민국임시정부-1919. 4 상해, 한성정부-1919. 4 서울)가 있었으나 전민족적 여망과 국제적 승인 획득이라는 목적달성을 위해 통합에 노력한 결과 종합임시정부를 1919년 9월 상해에 수립하였다. 

 

이후 내정, 군사, 외교, 재정 등 각 방면의 정책을 수립 시행하는 한편 독립군을 지원하며 조국의 광복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사건으로 일본의 핍박이 심해짐에 따라 상해를 떠나 가흥, 중경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 부분은 ‘백범일지’ 하권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으므로 반드시 이 책을 일독할 필요가 있겠다. 

 

빛 바랜 흑백 사진 속에 찍힌 그 시대 많은 우국지사들의 무표정하고 엄숙한, 혹은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띤 얼굴에 비치는 당당함과 비장함은 이 시대에 편히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감히 이해할 수 없고 흉내낼 수 없는 무게로 다가온다. 

 

계단을 내려가니 이곳을 다녀간 수많은 한국인, 이름 있는 이들의 소감이 적혀있다. 우리 입에서 쉽게 나올만한 익숙한 구절들이 눈에 띄는데 임정청사를 참관한 끝이라 모두 저마다의 깊은 생각을 가지고 썼을 것이다.

 

이곳에도 영락없이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출구로 나가는 길목에 있어 누구나 이 상점을 거쳐야 한다. 김구, 안창호 선생의 책에서 시작하여 열쇠고리, 손수건, 부채, 심지어 진주 목걸이까지 판매한다. 

 

마지막으로 들르는 작은 방에는 김구 선생의 동상이 놓여있고 상해 임시정부 수립부터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거사에 이르기까지의 기록영화를 상영하였다. 조선족 안내원 아가씨는 영화관람이 끝난 후 김구 선생의 동상에 묵념을 할 것을 권하였다. 

 

먼 여행에 피곤해 보이는 노인들도, 잘 차려입은 중년부인도, 반바지를 입은 아저씨도, 분주히 왔다갔다하던 어린 아이들도 일시에 고개를 숙인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한 가지 마음이 있을 것이다. 아가씨에게 인사를 건네고 문을 나서는데 도로변에 또 한 대의 관광버스가 서더니 한 무리의 한국인들이 차에서 내린다.

 

 

 2. 홍커우공원(루신공원)

 

 중국인들에게 홍구공원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잘 모른다고 할 것이다. 예전에는 홍구공원이었으나 중국의 위대한 문학가이며 사상가, 교육자였던 노신선생의 무덤과 기념관이 있는 루쉰공원으로 이름을 바꾼 지 오래되었다. 

 

이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 길이 없도록 한국과 관련된 흔적 하나 없던 이 공원에 우리 한국의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 사업회에서 주선하여 1994년에 윤봉길 의사의 호 ‘매헌’을 딴 ‘매정’이라는 정자를 지었고 1998년에는 그 앞에 의거현장표석과 사적비를 세웠다. 마침 집 앞에서 139번 버스를 타면 20여 분 만에 가기 때문에 지난 넉 달 동안 루신공원에 세 번 정도 다녀왔다. 

 

공원 중앙의 루신선생 동상과 묘를 지나 오른 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가면 중국어와 영어가 씌어 진 돌이 하나 서있고(윤봉길의사 의거현장표석인 듯 하나 의거에 대한 직접적 언급은 없고 ‘역사적으로 일어났던 일을 기념한다’라고만 적혀 있다. 확실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중국 땅에 한국의 것을 지으려니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바로 뒤에 울타리와 작은 문이 하나 나있다. 울타리 안으로 들어서면 그제야 중국어와 한국어로 이 홍구공원에서 어떤 일이 있었나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사적비가 보인다. 

 

함께 간 아이들에게 비석의 내용을 참고해서 윤봉길 의사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충남 시골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농촌 근대화운동을 벌이던 그는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고향을 떠나 중국 상해 임시정부로 갔으며 그 곳에서 김구선생이 이끄는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본천황의 생일인 천장절 겸 상해사변 전승축하식에 침투하여 폭탄을 던져 일본의 수뇌급 수명을 폭살시켰는데 이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항일 독립투쟁을 세계 만방에 알린 쾌거로서 윤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1932년 12월 19일 총살형으로 장렬히 순국하였다는 내용인데 그간 책에서 보고들은 적은 있었지만 그곳이 바로 여기다하고 가리키니 싫증 내지 않고 주의해서 잘 듣는다. 현장교육의 덕을 아이들이 톡톡히 본 셈이다.

 

돌비석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2층 정자가 하나 서 있다. 첫 번째로 그 곳에 갔을 때는 중국 노인 둘이서 전통 악기 연주와 창을 하고 있었다. 이 공원은 대구의 달성공원처럼 노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숲 속의 테이블에서 마작, 카드, 장기, 바둑을 두기도 하고 넓은 잔디밭에서 태극권을 하거나 조금 젊은 층들은 댄스를 즐기기도 하는데 곳곳에서 우리나라 아쟁처럼 생긴 전통악기를 연습하는 노인들이 많다. 두 눈을 지긋이 감고 연주에 몰두하는 저 노인은 이 정자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을까, 연배로 보아 과거의 일들을 들었음직도 한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로 한국 정자 매정을 찾았을 때 2층에서 젊은 두 남녀가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중국의 길거리와 공원은 데이트 족들의 아지트이다. 주위에 누가 있건 전혀 남을 의식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들을 다 한다. 

 

다소 고지식한(?) 우리 아이들은 ‘중국의 장단점 말해보기’에서 제일 먼저 ‘남부끄러운 줄 모른다’를 단점 중의 하나로 꼽았다. 서로 껴안고 다정하게 속삭이고 있는 저 외국젊은이들은 이 정자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지어졌는지 알까? 아니 이야기를 듣고서도 관심이나 있을까?

 

6월 말, 세 번 째로 매정에 갔을 때 마침 윤봉길 의사 서거 70주년 기념 사진전을 열고 있었다. 평소 아무 것도 없었던 이 정자에 현재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자료나마 잘 정리되어 있었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 있는 그의 생가, 고향에서 농민계몽․농촌부흥운동을 위해 조직한 단체인 월진회의 명부, 거사 직전 김구선생과 마지막으로 찍었던 사진. 그 속엔 비장하고 늠름한 그의 기상이 서려 있다. 

 

물통과 도시락 그릇으로 만든 폭탄, 현장에서 끼고 있던 김구선생의 2원짜리 시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장의 희미한 사진은 총살 직전 일본인들에게 두 눈을 가리우는 장면과 총알이 이마를 관통한 처참한 모습이었다. 

 

이번에 매정에서 우리 가족을 맞이한 사람은 서투르지만 한국어를 즐겨 써서 조선족이라고 오해받을 뻔한 상해사람이었다. 선량하게 생긴 그는 독학으로 한국어를 배웠다며 한국어 교본도 보여주었다. 

 

정자 안 작은 판매대에서 자신이 개발한 기념품을 팔고 있는데 살펴보니 살 만한 특별한 물건은 없어도 스스로 한국에 대해 배워야겠다는 의지는 대단했다. 일부러 열쇠를 꺼내 이층으로 안내해서 문을 열어주었다. 현재 생존하는 아흔이 넘은 윤봉길 의사의 친동생이 쓴 현판이 양쪽에 걸려 있었다. 

 

조국애와 농민의 중요성을 강조한 윤봉길 의사의 어록에서 옮겨 쓴 글들이었다. 일층에서는 의사의 모습을 보았고 이층에서는 그의 음성을 들은 듯하였다. 한국말을 열심히 배우고 있는 그 중국아저씨는 방명록에 서명하고 함께 사진 찍기를 원하였다. 꼭 장삿속만은 아닌 듯 하였다.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 매정을 두 번 보았고 윤봉길 의사의 생애 사진과 글이 전시된 꽉 찬 매정을 한번 보았다. 왜 유적지와 기념관을 만드는 일이 필요한가 그 이유를 확연히 깨달을 수 있었다. 무심히 살아가는 오늘날 잊혀진 과거를 떠올리게 하고 소시민적인 나의 삶과는 다른, 가치 있는 삶이 있었음을 생각하게 한다. 

 

 다음은 거사 직전 윤봉길 의사와 김구 선생이 헤어지는 장면으로 ‘백범일지’에 기술되어 있다. 상해임시정부청사, 홍구공원을 둘러보고 나서 이 글을 읽으면 두 위인의 모습이 가슴에 와 닿는다. 중국인에게는 이 공원이 루신공원이겠지만 한국인에겐 언제나 홍구공원으로 남을 것이다. 

 

 

 ‘윤군을 여관으로 보내고 나는 폭탄 두 개를 가지고 김해산군 집으로 가서 김군 내외에게 내일 윤봉길군이 중대한 임무를 띠고 동삼성(만주)으로 떠나니 고기를 사서 이른 조반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튿날은 4월 29일이었다. 나는 김해산 집에서 윤봉길군과 최후의 식탁을 같이 하였다. 밥을 먹으며 가만히 윤군의 기색을 살펴보니 그 태연자약함이 마치 농부가 일터에 가려고 넉넉히 밥을 먹는 모양과 같았다.

  김해산 군은 윤군의 침착하고도 용감한 태도를 보고 조용히 내게 이런 권고를 하였다.

  “지금 상해에 민족 체면을 위하여 할 일이 많은데 윤군 같은 인물을 구태여 다른 데로 보낼 것은 무엇이오?”

  “일은 하는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좋지. 윤군이 어디서 무슨 소리를 내나 들어봅시다.”

나는 김해산 군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식사도 끝나고 시계가 일곱 점을 친다. 윤군은 자기의 시계를 꺼내어 보며,

  “이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대로 6원을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니 제 것하고 바꿉시다.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밖에는 쓸데가 없으니까요.”

하기로 나도 기념으로 윤군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는 윤군에게 주었다.

식장을 향하여 떠나는 길에 윤군은 자동차에 앉아서 그가 가졌던 돈을 꺼내어 내게 준다.

  “왜 돈은 좀 가지면 어떻소?”

하고 묻는 내 말에 윤군이,

  “자동차 값 주고도 5, 6원은 남아요.”

할 즈음에 자동차가 움직였다. 나는 목이 메인 소리로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하였더니 윤군은 차창으로 고개를 내밀어 나를 향하여 숙였다. 자동차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천하영웅 윤봉길을 싣고 홍구 공원을 향하여 달렸다.’